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알래스카 정상회담이 끝나자마자 즉각 휴전과 대(對)러시아 제재 등 종전 입장을 뒤집자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게만 유리한 판을 만들었다는 혹평이 일제히 쏟아졌다. 다만 우크라이나 안보 보증(Security Guarantees)이라는 새로운 카드가 부상하면서 우크라이나 종전으로 향하는 문을 열 수 있을지 관심이 모아진다.
트럼프 대통령은 15일(현지 시간) 미국 알래스카주 엘먼도프·리처드슨 합동기지에서 푸틴 대통령과 3시간가량 정상회담을 갖고 “합의하지 못한 게 아주 적게 남아 있고, 아마 가장 중요한 하나의 경우 합의점에 도달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며 모호한 설명만 늘어놓았다. 트럼프 대통령은 회담 직후 트루스소셜에 “끔찍한 전쟁을 끝내는 최선의 방법은 단순한 휴전협정이 아니라 평화협정으로 직행하는 것이라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며 기존 입장을 뒤집는 발언을 내놓았다. 평화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전쟁을 이어간다는 푸틴 대통령의 입장과 같다.
주목할 대목은 트럼프 대통령이 회담 다음 날인 16일 유럽 지도자들과 가진 전화 회의에서 꺼내놓은 안보 보증 방안이다. 그는 “평화 협상의 지속성을 보장하기 위해 서방의 군대를 우크라이나에 주둔하는 방안을 푸틴 대통령이 수용했다”고 말했다. 이는 트럼프 대통령이 외국 전쟁에 휘말리기 싫다는 이유로 일관되게 거절했던 방안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그간 우크라이나는 평화협정이 체결될 경우 러시아의 침략 재발을 막기 위해 미국의 우크라이나 안보 보증이 필수적이라는 입장을 견지해왔으나 트럼프 2기 행정부는 부정적이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올 2월 말 백악관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공개 석상에서 거친 말다툼을 벌인 요인 중 하나도 젤렌스키 대통령이 안보 보증을 요구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유럽연합(EU)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주요 회원국들 역시 유럽군이 우크라이나에 주둔하도록 하고 미국이 유럽군을 지원할 것을 요구했으나 트럼프 행정부 측은 응하지 않아왔다. 전화 회의에 참여한 일부 유럽 관계자들은 러시아가 신의와 성실을 바탕으로 협상할 용의가 있다는 전제하에 만약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안보 보증을 해준다면 젤렌스키 대통령이 푸틴과 타협할 여지가 생긴다는 평가를 내놓았다고 WSJ는 전했다.
로이터통신도 유럽 정상들이 트럼프 대통령과 나토 조약 5조와 유사한 우크라이나 안보 보증 방안을 논의했다고 전했다. 나토 조약 5조는 회원국 중 한 곳이 공격을 받으면 회원국 전체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하고 대응한다는 집단방위 조항이다. 우크라이나가 나토에 가입하지 않더라도 러시아가 다시 침공하면 서방국가들이 공동 대응한다는 의미로 읽힌다. 이와 관련해 우크라이나 안보 보증 방안을 논의하는 20여 개국 협의체 ‘의지의 연합’이 17일 화상회의를 갖고 구체적인 방안을 논의했다.
다만 전제 조건은 우크라이나의 영토 포기일 가능성이 높다. 트럼프 대통령은 유럽 지도자들과의 전화 회의에서 “젤렌스키 대통령이 돈바스 지역을 포기한다면 러시아와 신속하게 평화 협상을 할 수 있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돈바스는 우크라이나 동부 도네츠크주와 루한스크주를 가리킨다. 러시아는 현재 루한스크의 거의 전부, 도네츠크의 약 75%를 장악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젤렌스키 대통령이 18일 백악관을 찾는다. 이 자리에서 영토 포기의 대가로 안보 보증 카드를 받아들일지, 아니면 영토를 포기할 수 없다는 기존 입장을 재확인할지 우크라이나의 운명이 걸린 판단을 내릴 것으로 관측된다. 트럼프 대통령은 젤렌스키 대통령과의 회담이 원만할 경우를 전제로 22일까지 푸틴 대통령을 포함한 3자 회담을 마련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다만 트럼프 대통령의 호언장담과 달리 전쟁을 종식하지 못한 채 최소 몇 년이 걸릴 수 있는 안보 체계 구축과 영토 포기를 협상 조건으로 내걸었다는 비판적인 시각이 현재로서는 우세하다. 보리스 존슨 전 영국 총리는 “국제 외교 역사상 가장 구역질 나는 에피소드”라며 맹비난했고, 뉴욕타임스(NYT)는 “우크라이나의 고통을 외면했으며 푸틴 대통령에게 전쟁을 계속할 시간을 벌어줬다”고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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