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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람-유명희 통상교섭실장]'한국의 커틀러'보다 나만의 길 고민...국가 위해 쓰이면 만족해요

'소녀 유명희'의 꿈은 작가였지만

'개방 압박서 韓 지키는 일' 통상 선택

1995년부터 통상전문가로 이름 알려

2000년대 중반 싱가포르와 FTA 협상서

자리 박차고 나간 것은 철저히 계산된 행동

내가 이겼던 협상? 100% 승리는 없어

'최초' 수식어 함께했지만...자리연연 안해

유명희 산업통상자원부 실장./송은석기자




통상은 전쟁이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개정과 철강 관세 문제를 마무리하고 귀국한 김현종 산업통상자원부 본부장도 협상 결과를 설명하며 거란에 맞서 강동 6주를 얻어낸 고려의 서희 장군을 인용했다. 미국을 상대로 10년 넘게 전선의 최전방에 선 여(女)장수가 있다. 유명희(52·사진) 통상교섭실장이다. 공직생활 동안 정치권력의 부침이 있었지만 그는 꾸준히 부름을 받아 협상 테이블에 앉았다. 노무현 정부에서 시작해 이명박 정부에서 끝을 맺은 한미 FTA에서는 서비스 분과장을 맡았고 박근혜 정부에서는 청와대 외신대변인으로 근무했다. 현재는 통상교섭실장이자 한미 FTA 개정협상 수석대표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강력한 보호무역주의 파고를 선두에서 막아내고 있다.

광화문에 위치한 무역보험공사 11층. 그의 간이 사무실이 있는 곳이다. 한미 FTA 3차 개정협상을 앞두고 출국을 하루 앞둔 시점. 자료를 읽고 있던 그의 시간을 인터뷰로 뺏는다는 생각이 들 만큼 그의 책상에는 못다 읽은 보고서들이 여기저기 놓여 있었다.

안부를 물으려는 찰나 그가 휴대폰을 들여다봤다. 올해 고등학교 1학년이 된 딸에게서 온 문자. 내용은 학교에서 실시한 영어 스피치 결과가 좋지 않았다는 내용이었다. 딸 아이에게 어떠한 위로를 건네야 할지 고민하는 그에게 적절한 조언은 하지 못한 채 ‘소녀 유명희’의 이야기부터 들어보기로 했다.

유명희 산업통상자원부 실장./송은석기자


유 실장의 어렸을 적 꿈은 작가였단다. 그는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쭉 썼던 일기장을 간직하고 있다”며 “초등학교 3학년 때 일기에 작가가 되고 싶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어린이 잡지에 글을 응모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유 실장은 서울대 영문학과에 진학하며 작가로의 진로를 고민하기도 했다. 그랬던 그는 어떻게 통상 공무원의 길을 걷게 됐을까. “1990년대는 세계무역기구(WTO)가 출범하고 세계화의 열풍이 불었습니다. 묘하게 동경이 되더군요.” 한국은 당시 세계 열강들로부터 개방의 압박을 받기 시작하던 때다. 지난 1990년에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진행 중이던 우루과이라운드 협상에 항의하며 이경해 농어민후계자협의회장이 할복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유 실장은 당시를 “1995년도 WTO가 출범할 때 농업 개방을 둘러싸고 첨예한 갈등이 있었고 안타까운 일들이 생겼다”며 “개방이라는 문제를 두고 첨예한 갈등이 나라 안팎으로 커졌다”고 회상했다. 그러면서 “무역으로 먹고사는 우리나라에 있어서 통상의 업무가 국내의 갈등까지도 조정을 하고 더 나아가 세계를 상대로 한국을 지킬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을 했다”며 “그럼에도 막상 한국에는 오래된 전문가가 없었고 통상 전문가가 필요하겠다는 생각에 통상으로 발을 들여 놓았다”고 설명했다. 행시 35회인 유 실장은 1992년부터 총무처 일반 행정직으로 공직을 시작했다. 총무처에서 일을 하던 중 통상산업부가 모집한 제1기 여성 통상직에 선발돼 1995년부터 통상 전문가로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의 별명은 한국판 칼라 힐스. 시간이 지나 웬디 커틀러라는 별명도 생겼다. 이들은 각각 1990년대와 2000년대 미국의 무역대표부(USTR)를 이끌었던 여성이다. 그에게 별명이 마음에 드는지 물었다. 그는 “1995년 제가 통상산업부 들어왔을 때 미국 여성 USTR 대표가 칼라 힐스였다”며 “제일 앞장서서 한국에 개방 압박을 하던 협상가였다”고 떠올렸다. 적진의 협상가여서였을까. 그는 “저를 한국의 칼라 힐스로 키운다는 표현이 있었는데 그러한 별명에 대해서 특별한 느낌은 없다”고 답했다. 이어 “지금은 우리나라도 곳곳에 통상 쪽에 근무하는 여성 후배들이 굉장히 많다”며 “누구를 설명할 때 이제는 외국 저명인사의 이름을 인용할 필요 없이 우리나라에도 훌륭한 통상 분야의 후배와 동료들이 있다”고 말했다.

혹시 칼라 힐스나 웬디 커틀러 말고 따로 ‘롤모델’로 두는 협상가가 따로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그에게 “어려웠던 상대나 존경하는 협상가가 있느냐”고 질문했다. 그는 “없다”고 말했다. 유 실장은 “아직은 특정인의 모습보다는 어떤 길이 더 좋을지 끊임없이 고민하고 있다”며 “누구나 다 같은 상황에서 같은 과제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니까 나만의 길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약간 걱정이 됐는지 대답 마지막에는 상사인 “백운규 장관과 김현종 본부장을 좋아한다”는 말도 웃으며 덧붙였다.



협상가로서 몸에 밴 당당함이 풍기는 그였지만 오히려 영웅담은 들을 수 없었다. 그는 “본인이 승리했다고 생각하는 협상이 있느냐”고 묻자 “협상에 있어서 100% 승리는 없었다. 협상은 55대45 또는 49대51의 결과로 나타난다”고 답했다. 그러면서 “특정 FTA나 협상을 승리했다고 말하는 순간 상대국이 기분 나빠할 수 있다”며 “여전히 다양한 회의 장소에서 그들을 만나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영웅담을 듣고 싶었던 것은 유 실장이 2000년대 중반 싱가포르와의 FTA에서 자리를 박차고 나간 일화가 잘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것은 잘 쓰지 않는 전략”이라며 “상대방이 ‘유명희는 원래 잘 일어나는 사람’이라고 인식하는 순간 협상은 꼬이기 시작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배경에는 ‘이 정도까지 양보했는데 상대방이 새로운 것을 요구하면 일어나겠다’는 마지노선이 우리 통상당국에서 합의됐기 때문”이라며 “철저하게 계산된 행동이다. 당시에는 싱가포르에서 새로운 요구 리스트를 나에게 건네자 다시 돌려주며 협상장을 떠났고 그 다음날 바로 우리의 요구대로 협상이 타결됐다”고 말했다.

치고 빠지는 타이밍을 잡아내고 상대방을 몰아가는 장수로서의 기질은 타고난 듯했다. 어렸을 때 부모님으로부터 “얘는 어쩜 이렇게 말을 똑 부러지게 잘하느냐”는 소리를 들었던 유 실장은 결혼 후 엄마가 돼 떠난 미국 유학 중에는 냉철한 협상가로서의 모습을 아들에게 증명해 보였다. 유 실장은 통상 공무원이 된다면 미국 법을 공부해야 한다며 1999년 미국 유학을 떠났고 로스쿨 명문 대학인 밴더빌트대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고 변호사 자격증을 딴 바 있다. 그는 “서른세살 애 엄마가 말도 잘하고 똑똑한 사람이 모인다는 로스쿨에서 경쟁하기는 쉽지 않았다”며 20년 전 로스쿨 수업의 하나로 진행됐던 모의법정을 떠올렸다. 그는 “모의법정에서 나의 상대는 로스쿨 학생 중 가장 뛰어난 학생이라 주변 친구들이 힘내라는 말을 했었다”며 “수업을 들었던 학생 중 10%에 해당하는 외국인이었던 내가 모의법정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어린아이였던 아들에게 엄마의 자랑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시상식에도 데리고 갔다”고 말했다.

유 실장이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은 한국 통상의 역사지만 그는 자리에 연연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산업부 최초 여성 국장·실장에 올라 ‘유리천장 브레이커’라는 수식어가 뒤따르고 있음에도 말이다. 그는 “보람 있는 일이 저에게 주어진다면 그 일을 하고 싶을 뿐”이라며 “국가를 위해 제 능력이 쓰이면 만족감을 느끼는 것이고 공무원으로서 무엇이 되겠다는 목표에는 스스로 가치를 두지 않고 있다”고 담담히 설명했다.

50대를 넘어선 그는 아직 은퇴 이후의 삶을 뚜렷하게 계획하지는 않았지만 새로운 일에 도전하고 싶다는 의지만큼은 명확했다. 유 실장은 “요즘 100세 시대라 어느 분야가 될지 모르겠지만 은퇴를 하고 난다면 다른 일을 찾아 잘해보고 싶다”며 “지금까지 이뤄낸 성과에 연연하지 않고 처음부터 시작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도전해보고 싶다”고 했다.

통상 전문가가 되고 싶은 후배들에게는 “우리 언어와 문화와 전통이 우리에게 큰 자산이지만 국제무대에 나가서 외국어를 자유롭게 구사하기 위해서 더 노력해야 한다”는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유 실장은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아세안)과 유럽연합(EU)은 서로 이웃을 맺으며 자연스럽게 공동의 이익을 대변해줄 수 있는 상황”이라며 “우리는 중국·일본과 동북아시아로 묶여 있지만 그들이 우리의 이익을 대변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형윤기자 manis@sedaily.com

유명희 She is…

△1967년 울산 △1990년 서울대 영어영문학과 학사 △1991년 행시 35회 △1992년 총무처 중앙공무원교육원 사무관 △1995년 통상산업부 세계무역기구담당관실 사무관 △1998년 외교통상부 북미통상과 사무관 △2005년 외교통상부 자유무역협정 정책과 과장 △2006년 외교통상부 자유무역협정 서비스교섭과 과장 △2010년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사무국 파견 참사관 △2014년 대통령비서실 홍보수석실 외신대변인 △2017년 산업통상자원부 통상정책국 국장 △2018년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실 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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