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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경제소사] '잔혹한 명군' 에드워드 1세

영화와 달리 업적 많아





1272년 11월16일, 영국 국왕 헨리 3세가 죽었다. ‘로빈 후드의 모험’에서 무능하고 악한 군주로 묘사된 존 왕의 아들인 헨리 3세의 사망(67세) 나흘 뒤 의회는 장남 에드워드(33세)를 새 국왕으로 내세웠다. 정작 대관식은 1274년 한여름에야 열렸다. 십자군 원정에서 회군하는 데 시간도 걸렸지만 새 국왕은 귀국을 서두르지 않았다. 이탈리아 등지를 두루 살피고야 돌아왔다.

툭하면 반란이 발생하던 시대였으나 새 국왕 에드워드 1세는 자신의 확고한 입지를 믿었다. 고모부인 시몽 드 몽포르 백작과의 내전에서 부왕과 함께 포로가 됐다가 탈출, 전세를 역전시킨 그는 에드워드 1세로 즉위한 후에는 더욱 정력적으로 정복사업을 펼쳐나갔다. 영국 서남부의 산지인 웨일스 지역을 완전 복속시키고 스코틀랜드에도 손을 뻗었다. 혼인 동맹 등을 통해 스코틀랜드를 접수하려던 그는 평화적 흡수가 여의치 않자 칼을 뺐다. 1995년 개봉작 ‘브레이브 하트’의 배경이 바로 이 시기다.

영화에서 멜 깁슨이 주연한 스코틀랜드의 독립투사 윌리엄 웰레스는 잔혹한 고문 끝에 ‘자유’라고 외치며 죽지만 과연 그럴까. 과장이 많다. 사실에 부합하는 것은 잉글랜드의 늙은 국왕 롱생크(longshanks)의 의지. 완전 정복을 앞두고 1307년 전장에서 죽으며 그는 이런 유언을 남겼다. ‘화장한 나의 뼈를 가죽 부대에 넣고 병사들과 함께 진군해라. 정복이 끝난 뒤에나 나를 묻어다오.’ 키 188㎝의 장신이어서 롱생크로 불렸던 왕이 바로 에드워드 1세다.



잔혹한 성정으로 묘사된 영화와 달리 에드워드 1세는 잉글랜드사에서는 명군으로 손꼽힌다. 법전을 모으고 행정제도를 체계적으로 정비해 ‘영국의 유스티아누스’로도 불린다. 의회 민주주의의 선구자라는 고모부 몽포르 백작을 패퇴시키고 그 시신을 잔혹하게 처리했다는 의혹도 있으나 의회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유연한 자세를 보였다. 31년 동안 통치하며 55회나 의회를 열어 의회를 가장 많이 소집한 국왕이라는 기록을 갖고 있다.

영어 발달사에도 영향을 미쳤다. 여느 왕족과 같이 성장기를 프랑스(노르망디)에서 보냈으나 즉위 이후부터 궁정에서 영어를 상용어로 쓴 최초의 영국 왕이다. 귀족들도 왕을 따라 영어를 썼다. 1066년 노르만 정복 이후 갈수록 프랑스어를 닮아가던 중세 영어는 독자적인 진화의 길을 걸었다. 유대인을 박해한 최초의 유럽 군주로도 손꼽힌다. 프랑스에서도 영지 방어전을 치렀던 그는 유대인의 재산을 전쟁비용에 충당하려는 목적으로 1290년 유대인 추방령을 내렸다.
/권홍우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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