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8년 8월26일 오전10시, 바쿠를 포위한 튀르크군이 앞세운 대포가 불을 뿜었다. 상대는 유전을 지키려는 영국-바쿠 연합군. 튀르크의 선공으로 시작된 바쿠전투는 19일 뒤 영국군의 철수로 끝났다. 사상자는 튀르크 2,000여명에 영국 200여명. 여느 전투에 비하면 규모가 작았지만 바쿠전투는 1차대전의 승패를 갈랐다. 바쿠에 전운이 감돌기 시작한 것은 1918년 3월부터. 월동을 마친 백계 러시아군이 볼셰비키와 싸우기 위해 철수한 빈 틈을 노리고 튀르크군 1만6,000여명이 쳐들어왔다. 튀르크의 확장을 우려하던 아르메니아 기독교인들과 러시아 볼셰비키는 미리 회교도 척살에 나섰다. ‘3월의 학살’로 불린 종교적 광기에 목숨을 잃은 아제르바이잔인이 약 1만2,000여명. 몇 달 뒤 아르제바이잔인들이 보복 학살에 나서 5만명의 아르메니아인들이 죽거나 집을 잃었다. 가뜩이나 반목하던 두 민족의 관계가 여기에서 결정적으로 틀어졌다. 독일과 동맹인 튀르크의 진격 소식에 영국은 황급하게 병력 1,000명을 보냈다. 여기에 바쿠 현지의 러시아인들이 공산당과 왕당파를 가리지 않고 5,000여명의 병력을 보탰다. 영국은 수적 열세를 극복하지 못한 채 철수했으나 바쿠에서 버틴 19일 동안 독일은 발을 동동 굴렀다. 호주머니 속에 있다고 생각한 바쿠유전이 영국군 점령하에서 계속 파괴됐기 때문이다. 결국 군대를 움직일 석유 공급선 확보를 위한 최후의 희망이 사라진 독일군은 바쿠전투 종료 한 달 뒤 강화회담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역사는 반복되는가. 구 소련의 해체로 형성된 힘의 공백 속에 등장한 민족주의와 석유자원이 또다시 피를 부르고 있다. 바쿠에서 시작된 송유관이 지나는 그루지야는 서방 국가들의 지원을 받으며 러시아와 전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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