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유수 대학을 흉내만 내서야 세계 최고가 될 수 있겠습니까. 남보다 앞선 아이디어로 새로운 기계를 ‘디자인’해낼 수 있는 공학도를 길러내는 것만이 한국과학기술원(KAIST)이 세계 최고 대학으로 도약할 수 있는 길입니다. 전세계적으로 이렇게 가르치는 대학은 KAIST밖에 없습니다.” 지난 7월 취임과 동시에 숨가쁜 대학 개혁작업을 추진 중인 서남표(사진) KAIST 총장의 호흡은 예상대로 역시 빨랐다. 취임 100일을 갓 넘긴 지금까지 서 총장은 남과 같아서는 최고가 될 수 없다며 KAIST를 디자인 중심의 공학대학으로 탈바꿈시키기 위한 세부 작업들을 발 빠르게 진행하고 있었다. KAIST가 지금까지 한국 과학기술의 핵심인력을 양성해왔다는 점에서 정부와 학계는 물론 산업계에서도 그의 개혁작업을 숨죽이며 지켜보고 있다. 공리적 설계이론의 창시자이자 미국 과학재단을 이끌었던 행정가로서 축적한 풍부한 이론과 실무 역량을 바탕으로 그가 조합하고 있는 KAIST의 미래상을 촘촘히 들여다봤다. -KAIST는 국민들 사이에서 인지도가 매우 높습니다. KAIST가 한국 사회에서 어떤 의미로 평가받고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KAIST가 성공하지 못하면 한국 경제도 성공하기 어렵습니다. 우리 경제가 대약진(quantum jump)을 이루기 위한 지식기반 산업을 육성하는 데 KAIST가 많은 공헌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국내 기업들은 저임금을 이유로 중국으로 떠나고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자본형성을 제대로 할 수 있는 곳도 중국이지 않습니까. 한국은 지식으로밖에 살 수 없고 바로 그 때문에 KAIST가 필요합니다. -총장 취임 후 진행되고 있는 개혁작업의 방향은 무엇입니까. ▦먼저, 정말 철저히 잘 가르쳐야 합니다. 학생 스스로 생각할 수 있고 모르는 것은 스스로 배우게 만들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학습(learning)만으로는 안됩니다. 한국 학생들은 수학에서 세계 1등을 자랑하는데 세계가 생각하지 못한 수학자ㆍ과학자ㆍ기술자가 되기 위해서는 학습을 뛰어넘어 ‘이해’(understaning)를 해야 합니다. 한국은 지금 학생 스스로가 디자인할 수 있는 산교육이 필요합니다. -구체적으로 현재 어떤 작업이 진행되고 있는지, 그리고 앞으로 어떤 것들을 중점적으로 추진할 계획이신지요. ▦1학년 과목이 모두 바뀝니다. ‘디자인’(설계) 중심의 엔지니어링 교육으로 전환됩니다. 문제를 풀고 해석하는 것은 어느 나라건 다 똑같지만 엔지니어링의 궁극적 목적은 기본적으로 ‘조합’(synthesis)을 가르치는 겁니다. KAIST에서 엔지니어링 교육을 받은 학생들은 앞으로 디자인까지 끌고 나갈 수 있는 능력을 만들게 됩니다. 아울러 한정된 재원을 모든 곳에 똑같이 투자해서는 세계 최고가 될 수 없습니다. 세계적인 대학들은 한 분야에만 100명에 달하는 교수가 있지만 KAIST가 이렇게 따라가기에는 시간이나 재정이 충분하지 않습니다. 이에 ‘KAIST연구원’을 설립해 생물학 분야 교수 20명을 한꺼번에 뽑을 계획입니다. 연구원을 중심으로 교수들이 서로 힘을 합쳐 연구를 한다면 분명 세계 최고 대학으로 오를 수 있습니다. -디자인 교육을 강조하시는데 아직까지 국내에서는 생소한 개념인 것 같습니다. ▦한국이 지식을 이용해 생산까지 하려면 디자인 능력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한국의 공과대학 교수들은 디자인에 매우 약합니다. 미국에서 교수생활을 하면서 보면 한국 학생들은 주로 ‘계산’을 하는 데 연구조교로 활용합니다. 수학이나 컴퓨터를 가지고 하는 작업을 잘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조합을 할 때는 한국 학생들을 잘 쓰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국내 기업들도 주로 외국에서 라이선싱을 받아 일을 하다 보니 디자인에 약한 실정입니다. -KAIST가 디자인 교육을 통해 어떤 방식으로 성공할 수 있을까요. KAIST의 디자인 개념이 MIT의 미디어연구소(Media Lab)와 유사한 형태로 적용되는 건가요. ▦디자인 개념은 크게 예술(art)과 과학(science) 두 가지입니다. KAIST가 생각하는 디자인은 ‘과학’인 반면 미디어랩은 디자인을 ‘예술’로 생각합니다. 엔지니어링 시스템을 피카소처럼 할 수는 없지요. 기계가 돌아가야 학교도 잘됩니다. 기계를 돌리려면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가 결합해야 하고 새로운 기계를 디자인하려면 많은 시간이 소요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남보다 빠른 컨셉트로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을 하루아침에 만들어 세계에서 가장 앞서나갈 계획입니다. 우리는 인문계통을 가르쳐도 과학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가령 심리학의 경우 뇌파 등 과학이 포함됩니다. 디자인을 하기 위해서는 모든 지식이 필요합니다. 전세계적으로 이렇게 가르치는 학교가 없습니다. -총장님의 발전구상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재원확보가 관건인데요. ▦긴 시야로 보면 여러 방안이 있지만 현재로서는 정부에 기댈 수밖에 없는 형편입니다. 매년 25%씩 예산을 올려달라고 요구하고 있지만 정부는 큰 돈이라며 아우성입니다. 싱가포르의 경우 MIT에 매년 2,000만달러씩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를 조건으로 싱가포르가 받는 혜택은 MIT 교수가 현지에 와서 강의를 하고 학생들이 방학 때 MIT에서 연구실험을 하는 정도입니다. 결국 긴 장래를 내다보고 투자하는 것이지요. 그것도 남의 나라의 대학에 말입니다. KAIST는 바로 우리나라 재산 아닙니까. 정부나 기업 모두 신경을 써야 합니다. -어느 정도 재원이 소요될지 관련 수치를 가지고 계십니까. ▦관련 데이터는 많이 있습니다. 가령 세계적으로 뛰어난 대학들은 학생들이 논문을 작성하는 데 학생 6명당 교수 1명 정도입니다. 이를 KAIST와 비교해보면 700명의 교수가 필요한데 현재 400명 수준입니다. 이런 식으로 우리가 경쟁하려는 세계 유수 대학과 비교해 계산해보면 KAIST 예산이 MIT의 6분의1밖에 되지 않더군요. 이를 3분의1로만 줄이더라도 충분히 경쟁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지금 예산보다 2배 정도 더 늘어나야 합니다. 장기적으로 총 5조원의 기금이 확충돼야 하지만 당장은 힘들고 앞으로 7년간 1조원을 조성할 계획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산업계의 도움이 필수적입니다. -공동 연구개발 등 기업을 통해 재원을 확보할 수 있는 대책들이 중요하게 부각될 수밖에 없는데 구체적인 복안을 마련하고 계신지요. ▦여러 가지 아이디어가 있습니다. 산업계 리더에게 찾아가 총장 자문역을 해달라고 요청하고 이들에게서 아이디어와 함께 재정적 지원을 함께 받을 생각입니다. KAIST가 국내 기업들에 많은 도움을 줬다고 생각합니다. KAIST가 비약하는 데 정부에 기대지만 말고 좀 도와달라고 요구할 생각입니다. 삼성을 찾아갔더니 KAIST 출신 임원들이 상당하더군요. 삼성은 우리에게 빚을 진 것입니다. “이제 빚을 갚을 때가 되지 않았나요.” 저는 이런 식으로 이야기합니다. -현재 매년 700명 수준인 신입생 정원을 조정하는 방안도 고려하고 계시는지요. ▦하버드ㆍ프린스턴 등 미국 유명 대학의 학부 학생 규모를 보면 1,000명이 제일 좋더군요. 현재 KAIST가 700명 수준인데 이 역시 1,000명으로 올릴 계획입니다. 국내 과학고 졸업생이 매년 1,700명에 달하고 KAIST 재학생의 70%가 과학고 출신입니다. 정원을 300명 더 늘려도 아주 우수한 학생들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단, 늘어난 300명에 대해서는 수업료을 받겠습니다. 단지 학교 재정을 위해 기성회비 이외에 수업료를 받겠다는 게 아닙니다. 학생들에게 무조건 공짜로 배우는 게 좋지 않다는 점을 가르쳐주기 위해서입니다. -재원 문제가 해결되면 다른 부분들도 순조롭게 해결된다고 보시는지요. ▦가장 걱정하는 부분이 바로 좋은 두뇌들을 모이게 하는 여건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통계를 보니 세계 300개 공과대학 중 10개만이 좋은 인재들을 배출할 수 있더군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머리가 좋은 학생들은 모두 유명 대학을 선호하기 때문입니다. 삼성이 세계 D램 시장을 압도하듯 대학도 마찬가지입니다. - KAIST 주변 인프라가 함께 개선돼야 KAIST 개혁의 성과도 극대화할 수 있지 않을까요. ▦좋은 인재를 모이게 하려면 생활여건이 좋아야 합니다. 그러나 현재 대전에는 좋은 병원이나 외국학교가 없습니다. 대전시와 충남도ㆍ중앙정부가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다행스러운 건 앞으로 의사면허 소지자들이 KAIST에 입학, 의료 관련 기계를 만들거나 환자 연구를 하며 병역의무를 대체하는 ‘메디컬닥터 박사과정’(MD Ph.d.)이 국내 최초로 신설됩니다. 이를 토대로 대전에 좋은 병원이 들어서야 대전도 발전할 수 있습니다. 또 현재 이곳에 모인 수많은 연구소들이 마치 기름방울 떨어진 듯 분산돼 있습니다. 이곳에 재직하고 있는 유능한 연구원 100명을 KAIST 겸직교수로 활용해 서로 협력할 수 있도록 만들 계획입니다. ● 서남표 총장은
격식 보다는 내실 중시
美MIT대 교수·과학재단 부총재 역임 지난달 19일 과학기술부 브리핑룸. KAIST 발전구상을 대외에 처음으로 알리는 공식석상에서 서남표 KAIST 총장의 파격적인 행보는 기자들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미리 준비한 자료를 '읽는' 수준의 의례적인 브리핑을 예상하고 있었던 기자들 앞에서 서 총장은 정장 상의를 벗으며 "모두발언은 필요 없고 바로 질의응답으로 들어가시죠"라며 기자들의 적극적인 질문을 유도했다. 아직까지 '서남표'라는 이름 석자는 전 KAIST 총장이었던 로버트 러플린만큼 대중적이지 못한 게 사실이다. 러플린 전 총장의 경우 노벨상 수상자라는 화려한 이력과 함께 첫 외국인 총장이라는 수식어가 붙었지만 서 총장은 전 미국 과학재단 부총재를 역임했다는 점 이외에 일반인들의 눈길을 끌 만한 수식어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전쟁이 막 끝난 지난 54년 서울사대부고 2학년이었던 그는 당시 서울대 교무처장을 지낸 부친을 따라 일찌감치 미국으로 건너갔다. 59년 MIT 기계공학과를 졸업한 뒤 카네기멜론대에서 기계공학 박사학위를 받고 70년 MIT 기계공학과 부교수로 부임했다. 학업 초창기 시절 미국 유학생은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 극소수였던 시절이었다. 그의 이름이 한국 사회에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한 계기는 84~88년 4년간 대통령 추천으로 상원의 인준을 받는 미국 과학재단(NSF)의 공학담당 부총재 자리에 오르면서부터. 격식에 구애받지 않는 그의 성격은 부총재 재직시 유감 없이 발휘됐다. 당시 과학재단 연구비를 받는 연구자는 반드시 보고서를 의무적으로 내야 하는 절차에 대해 서 총장은 "연구 성과의 판단이 오로지 논문이냐. 내가 부총재를 할 동안에는 연구보고서를 받지 말라"고 주문했다. 그는 KAIST 총장으로 취임한 후 학내에서도 "임팩트가 없는 논문은 의미가 없다"며 교수들에게 알맹이 없는 논문보다는 연구에 보다 신경 써달라고 주문하고 있다. 서 총장의 예사롭지 않은 체력도 주변 사람들에게 단연 화제다. 그는 최근 학내 운동장을 리모델링해 재개장하는 행사를 치를 당시 국가대표 이천수를 능가하는 힘찬 시축으로 주변의 탄성을 자아냈다. 고희를 넘긴 서 총장이 혹시 좌절(?)하지 않을까 걱정한 직원들이 이미 골키퍼에게 '막는 척하고 막지는 말라'는 당부를 해놓은 상태였지만 서 총장은 20대 젊은이와 같은 힘찬 발길질로 골대 오른쪽 상단을 꽉 채우는 강슛을 날렸다. 이에 놀란 학생들이 '설마 설마…'하며 재차 시축을 요구하자 서 총장은 1차 때와는 정반대인 왼쪽 상단으로 골을 성공시켰다. 서 총장은 학문적으로도 탄탄한 입지를 구축했다. 그는 '공리적 설계' 이론을 창시한 학계의 큰 별로 인정받으며 지금까지 300편 이상의 논문을 발표하고 50여개의 관련 특허를 보유하고 있다. 공리적 설계는 공학적 제품을 생산할 때 세우는 일련의 계획을 말하는 것으로, 서 총장은 KAIST 개혁에 자신의 이론을 적용, 최적의 효율을 거둘 수 있다며 강한 자신감을 나타내고 있다. 서 총장은 '딸부자'로도 유명하다. 부인 서영자씨와의 사이에서 현재 뉴욕타임스 기자, 하버드대 환경과학과 교수, IBM 직원, 다큐멘터리 제작회사 사장 등으로 활동하고 있는 4명의 딸을 두고 있다. ◇약력 ▦36년 경북 경주 ▦59년 미 MIT ▦70~75년 MIT 기계공학과 부교수 ▦84~88년 미 과학재단 공학담당 부총재 ▦91~2001년 MIT 기계공학과 학과장 ▦한국과학기술한림원 공학부 종신회원 ● "KAIST는 亞 공과대학 대표 모델"
日 JAIST·홍콩 HKUST등 벤치마킹해 문열어 지난 71년 한국과학원(KAIS)으로 첫 문을 연 KAIST는 아시아 지역 공과대의 힘찬 출발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그간 일본과학기술원(JAIST)ㆍ홍콩과학기술대학원(HKUST) 등 아시아 지역 내 유수 공과대학들이 KAIST를 벤치마킹하며 잇달아 문을 열었기 때문이다. KAIST에 따르면 2006년 현재까지 총 6곳의 국내외 공과대학들이 KAIST의 연구중심대학 운영방식과 산학협동 모델 등을 벤치마킹해 설립됐다. KAIST 모델에 가장 먼저 관심을 보인 곳은 흥미롭게도 세계 기술강국인 일본의 JAIST였다. 이 대학은 80년대 말 영재 위주의 교육 시스템으로 이공계 분야의 인재들을 배출해내던 KAIST의 독특한 대학 시스템에 일찌감치 눈독을 들여 첫 후발주자로 90년 설립됐다. 이에 뒤질세라 홍콩 HKUST가 1년 뒤 문을 열었고 2003년에는 중국과학기술대학(USTC)이 KAIST 측으로부터 학사 및 연구, 산학협력 시스템 전반에 대한 자문을 얻어 설립됐다. 가장 최근에는 파키스탄과학기술원(PAIST)이 KAIST를 벤치마킹해 올해 설립을 눈앞에 두고 있다. 국내 대학의 경우 이미 잘 알려진 대로 86년 포항공과대(POSTECH)와 93년 광주과학기술원(GIST) 등 2곳이 KAIST와 같은 연구중심 공과대학을 표방하며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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