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은행들에 대한 국가 구제금융 논의가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은 은행권 위기가 심화하면서 세계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일파만파로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유럽 은행들이 보유하고 있는 남유럽 국가들의 채권이 휴지조각이 될 위기에 처했는데 정부의 곳간이 바닥을 보이면서 더 이상 지원을 기대할 수 없게 된 것도 한 원인으로 꼽힌다. 사태가 더 나빠지기 전에 '링거주사'를 놓아 연명시키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단기적 처방에 불과해 해결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는 비관적인 견해도 나오고 있다. ◇국민 세금 투입되나=유동성 위기를 겪고 있는 유럽 은행들에 대한 각국 정부 차원의 구제금융 가능성은 개별 국가보다는 유럽연합(EU) 차원에서 처음으로 제기되고 있다. 유럽 언론들은 최악의 사태를 가정해 국민 세금으로 자금난에 빠진 은행들을 구제하는 방안이 거론되고 있다며 관련 기관에서 구체적인 투입방안을 마련 중인 것으로 전하고 있다. 신현송 미 프린스턴대 교수는 "유럽 은행은 은행위기와 국가부채 위기라는 쌍둥이 위기를 앓고 있다"며 "유럽 은행이 자금을 회수하면서 미국ㆍ신흥국 등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악영향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 유럽중앙은행(ECB)는 이뿐만 아니라 기준금리 인하 카드까지 만지작거리고 있다. ECB정책위원인 뤼크 쿠네 벨기에 중앙은행 총재는 "이르면 다음달 중 기준금리를 낮출 수도 있다"고 밝혔다. 유럽 각 은행들이 유동성 부족에 시달리고 있는 상황에서 더 이상 높은 수준의 금리를 유지할 수 없다는 데 따른 판단에서다. 미국의 대형 머니마켓펀드(MMF)들은 유럽 은행에서 돈을 빼내고 있다. 지난 8월 말 기준 미국 10대 MMF의 유럽 은행에 대한 단기대출 규모는 2,846억달러로 전체 자산의 42.1%다. 이는 2006년 하반기 이후 가장 낮은 수준으로 금융위기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보다도 적다. 이처럼 유럽 은행들의 유동성에 문제가 발생하자 주요20개국(G20) 재무장관들도 금융 부문의 안정을 위해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하고 우선 자금난을 겪는 은행에 충분한 유동성을 공급하는 데 합의했다. ◇미국식 은행 구제방식 부상=G20이나 EU가 공통적으로 제시한 은행 살리기 방안은 '공적자금' 투입이다. 유럽의 재정위기가 실물경제 침체에 이어 금융위기로까지 번지는 것을 사전에 막겠다는 의지를 나타낸 것이다. 이 같은 방식은 미국 정부가 사용한 전례가 있다. 2008년 말 대형 투자은행 리먼브러더스가 파산한 직후에 공적자금을 투입해 은행들의 연쇄도산을 막은 바 있다. 블룸버그통신은 유럽재정안정기금(EFSF)을 미국이 금융위기 때 자국 은행을 구제하는 데 동원했던 부실자산구제프로그램(TARP)처럼 차입으로 전환하자는 목소리가 유럽에서도 높아지고 있다고 전했다. 프랑수아 바로앵 프랑스 재무장관은 G20 장관 회동에 앞서 기자들과 만나 "유로권의 방화벽이 필요하다"며 "차입으로 EFSF를 보강하는 방안을 논의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회생 가능성 여부가 불투명한 상황에서 국민의 혈세가 투입되는 데 대한 반대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또 공적자금 투입으로 정부의 입김이 세지면 금융사들의 자율권을 침해하는 '은행 국유화'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고 우려한다. 국제신용평가사인 무디스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에 비해 미국을 비롯한 각국 정부가 대형 은행들을 지원해줄 가능성이 줄었다"고 언급했다. 이를 의식한 듯 미셸 바르니에 EU 역내시장 담당 집행위원은 "일부 은행들의 국가 지원을 배제하지 않고 있지만 가급적 민간 자본시장에서 차입하기를 바란다"며 조심스런 입장을 나타냈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복잡한 사정을 감안해 은행 구제안이 실현되기에는 적잖은 시일이 걸릴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하지만 유럽 은행들이 하루하루를 살얼음판 걷듯이 연명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시간은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견해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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