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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경제소사/7월10일] <1444> 비시 정권

SetSectionName(); [오늘의 경제소사/7월10일] 비시 정권 권홍우 편집위원 1940년 7월10일, 프랑스 중부의 휴양도시 비시(Vichy). 프랑스 국민회의가 표결에 들어갔다. 안건은 페탱 원수에 대한 ‘신헌법 제정권 부여’. 결과는 찬성 569표에 반대 80표, 기권 17표로 나왔다. 형식상 합법정부였지만 실제적으로는 독일 점령군의 앞잡이였던 비시 정권이 탄생한 순간이다. 프랑스에서 친독일 정권이 성립된 이유는 크게 세 가지. 독일의 승전이 확실하다는 판단 아래 전국토를 완전 점령 당하는 것보다는 남부지역이라도 건지는 게 낫다는 계산, 항복협정을 주도했지만 1차 대전에서 독일군을 물리쳤던 국민적 영웅인 페탱 원수에 대한 신뢰가 작용했다. 훗날 전쟁이 끝난 후 반역 혐의로 재판정에 선 페탱은 친독의 이유를 이렇게 둘러댔다. ‘국가 보전을 위해서….’ 프랑스는 과연 제대로 보전됐을까. 반대로 철저하게 수탈 당했다. 하루 4억프랑씩 독일 점령군 유지비용을 부담하고 ‘의무노동제’라는 이름 아래 프랑스 노동자 65만명이 독일 공장으로 끌려갔다. 프랑스 내 산업시설과 500만명의 노동력도 독일을 위한 군수물자 생산에 투입됐다. 비시 정권은 국민의 안위를 내세웠으나 2차 대전 중 프랑스 국민의 영양상태는 독일 직접점령지역보다 나빴다. 저항세력(레지스탕스)도 독일군보다는 비시의 민병대에게 더 많이 잡혔다. 7만명이 넘은 유대인을 독일에 넘긴 것도 비시 정권이다. 독일에 자발적으로 참여했던 비시 정권 인사들은 1944년 8월 프랑스가 연합군에게 해방된 뒤 철퇴를 맞았다. 페탱도 감옥에서 죽었다. 친독 언론인의 즉각 처형을 비롯한 반역자 처벌은 오늘날 프랑스의 기반이다. 일본 제국주의의 승리를 기원하며 민족을 배신했던 친일파 조선인들과 그 후손이 떵떵거리고 사는 한국과는 대조적이다. ‘깨끗한 손’만이 훌륭한 국가, 강건한 경제를 만든다. 혼자 웃는 김대리~알고보니[2585+무선인터넷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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