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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경제소사/11월8일] <1237> 트렌트호 사건


[오늘의 경제소사/11월8일] 트렌트호 사건 권홍우 편집위원 ImageView('','GisaImgNum_1','default','260'); 1861년 11월8일 여명, 카리브해. 북부연방의 1,567톤짜리 증기선 산 하신토호가 영국 통신선 트렌트호를 가로막았다. 공해상의 자유항행권과 대영제국의 위신을 믿은 트렌트호는 검문을 거부했으나 경고 포탄까지 날아들자 결국 멈춰섰다. 배를 샅샅이 뒤진 북부 해군은 몇 사람을 끄집어냈다. 남부동맹이 영국과 프랑스에 국가로서 인정받기 위해 파견하려던 외교사절 일행이었다. 거물급 포로를 잡은 함장 윌크스는 트렌트호를 돌려보내고 의기양양하게 보스턴항으로 돌아왔다. 북군이 연전연패하던 시기, 시민들은 그를 열광적으로 환영했다. 포로들은 감옥에 갇혔다.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도 처음에는 반색했으나 얼마 안 지나 낭패감에 빠졌다. 겉으로는 남북전쟁에 중립을 표했지만 남부산 면화수입이 중단돼 경제적 곤란을 겪고 있는 영국을 건드린 뒷감당이 걱정됐기 때문이다. 당장 영국 파머스턴 내각은 남부 외교사절 석방과 사과를 요구하고 나섰다. 북부에 대한 초석(화약의 원료) 등 전쟁물자 수출을 금지시킨 영국은 북부의 불응시 ‘전쟁 불사’ 의사까지 밝히며 캐나다에 대규모 전쟁물자를 비축하는 계획도 세웠다. 다급해진 링컨은 공식적인 사과성명은 발표하지 않았지만 이듬해 1월 남부의 외교사절을 석방해 영국으로 보냈다. 영국은 이를 외교적 승리로 받아들이고 사건은 마무리됐다. ‘건방진 북부를 손보자’는 주장이 많았지만 부군 앨버트 공과 사별한 빅토리아 여왕이 정무를 돌보지 않아 원정계획도 무산돼버렸다. 링컨은 뒷수습에도 적극 나섰다. 노예해방 선언에도 남부를 승인하려는 영국과 프랑스의 명분을 먼저 빼앗겠다는 전략이 깔려 있었다. 링컨이 양보하지 않았다면 미국은 단일국가로 존재할 수 있었을까. 구호에 집착하지 않는 실리 외교가 나라를 누란의 위기에서 구한 셈이다. 혼자 웃는 김대리~알고보니[2585+무선인터넷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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