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소설 속 주인공들은 머뭇거리고 스스로를 벗어나지 못한다. 이리저리 떠돌아 다니며 카페에서 문득 써 내리는 편지 같은, 혹은 일기 같은 얘기들이 이어진다. 하지만 조금씩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희망이랄까, 회복이나 치유에 대한 기대감이 엿보인다. 전작 '제비를 기르다'에서 조금씩 비쳤듯이.
소설가 윤대녕(50ㆍ사진)이 3년반만에 내놓은 소설집 '도자기 박물관(문학동네)'에는 총 7편의 단편이 실려있다. 등장인물들은 사랑하고 싶거나 그렇거나 그랬거나, 어찌됐든 상처와 그 이유가 있고 그래서 더 내면 속을 파고든다. 위태롭게 이어져 있는 삶에의 고리가 어느 순간 툭 끊기면, 한 줌의 재로 무너질 듯한 느낌으로. 하지만 이제 '지천명(知天命)'에 이른 작가는 조금씩 삶에서 희망을 읽어낸다. 회한과 자기 연민은 여전하지만, 이 책의 처음과 끝은 상처의 회복과 희망을 이야기 한다. 독자가 작가의 소설에서 스스로의 외로움과 고통을 읽어내듯이, 그의 글쓰기 역시 스스로를 치유하는 과정이 아닐는지.
주로 가족들로부터의 상처와 폭력, 강제에 노출되고, 어찌 보면 스스로 내던져버린 듯한 주인공은 발정기의 암컷과 수컷이 냄새를 맡듯 서로를 잡아당기고 고통스럽게 끊어낸다. 스스로 다가갈 때는 절실하지만, 다가오는 상대에게는 상처를 준다. 아니면 맞지 않는 옷 같은 평범한 사람과의 관계를 억지스레 이어가고 다시 상처 입는다.
일종의 '동어반복'일까. 알코올중독자 아버지를 둔 딸이 진절머리를 내면서도 결국 비슷한 배우자를 선택하듯, 뻔한 선택은 늘 뻔한 결과를 가져온다. 첫번째 단편 '비가 오고 꽃이 피고 눈이 내립니다'에서 여자는 22년전 대학시절 만나 하룻밤 함께 했던 남자에게 편지로 고백한다. 두 살림을 했던 아버지에게 고통받은 어머니를 보며 자란 그녀임에도 "당신은 상처를 두려워하면서도 늘 사람을 그리워하며 사는, 결국 웅크린 아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이지요. 고백하자면 나는 그 어둡게 웅크리고 있는 당신의 모습에 마음이 끌렸던 것 같습니다"라고.
하지만 여자를 받아주지 못했던 남자는 22년 후 병원 응급실에서 의식불명인 아내를 돌보고 있다. 공허한 메아리에 그칠 아내와의 대화 내용을 묻는 여자에게 남자는 전한다. "그대는 멋 곳에 혼자 있는 게 아닙니다. 비록 잠들어 있으나 바로 여기, 지금, 나와 함께 숨쉬고 있습니다. 내 손길이 느껴지지요? 그대는 잠결에 내 얘기를 듣고 있습니다. 꿈에서 나를 보고 있지요? 밖에는 지금 먼 데서 불어온 바람이 우리를 모로 지나쳐 또한 먼 곳으로 불어가고 있습니다. 바람의 소리가 귓전에 들리지요? 이렇듯 우리가 사는 세상은 여전히 비가 오고 꽃이 피고 눈이 내리고 있습니다."
마지막 작품 '통영-홍콩 간'도 마찬가지다. 중학교 무렵 외삼촌에게 성폭행을 당했지만 숨기기를 강요당했던 여자와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확신하는 남자. 결국 돌고 돌아 다시 만나는 지점, 여자가 기약 없는 삶에 끌어들인 피 한 방울 안 섞인 딸은 남자에게 몇 달 집 나간 아버지에게 얘기하듯 전한다.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오시래요. 통영에서 기다리시겠대요." 그간 작가의 소설 속에서 하릴없이 맴돌던 관계의 회복이자, 고통을 넘어서 타인의 상처에 손을 내미는 장면이다.
'반달'에서도 아버지 없이 자란 남자는 대학 동창과의 동성애적인 애착을 느끼면서도, 관계 속에서 제 모습을 들여다본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일은 그런 것이었다. 요컨데 나라는 거울을 통해 매 순간 상대를 찾고 그리워하는 일이 바로 사랑이었다. 또한 상대를 통해 나라는 존재를 찾아내는 일이었다."
작가는 책 말미에 "오십대로 접어들면서 고통에 대한 사유와 삶의 이면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잦았던 것 같다. 여기에 수록된 소설들은 그러한 시간의 집적이자 흔적이 되겠다"고 밝혔다. 그의 말처럼 삶에 대한 시선은 깊고 부드러워지고, 그만큼 희망도 간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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