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지난 14일 발표한 전후 70주년 담화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것으로 보인다. 최근 여론 조사에서 아베의 다른 우경화 정책들인 안보 법안이나 원전 재가동 등에 대해서는 반대 여론이 여전히 우세했지만 아베 담화를 '의미 있게 평가한다'는 반응(48%)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응답(37%)을 크게 넘어섰다. 일본 최대의 요미우리신문이 15~16일 실시한 전화 여론조사 결과다. 앞서 교도통신과 후지뉴스네트워크(FNN)·산케이신문 등 다른 조사와 흐름이 비슷하다.
담화 직후만 하더라도 "이런 담화는 낼 필요가 없었다"는 아베 내각 지지자와 반대자 양측 모두에게서 공격을 받았던 것에 비해서는 확실히 변화된 기류다. 일본 내 여론이 이렇게 변한 데에는 "다음 세대에는 사죄의 숙명을 짊어지게 해서는 안 된다"라는 부분이 긍정적으로 작용한 것처럼 보인다. 여기다 형식적으로나마 무라야마(전후 50주년), 고이즈미 담화(전후 60주년) 등 역내 내각의 반성과 사죄를 계승했다는 것이 평가를 받았다. 과거형에다 3인칭 표현으로 주체가 불분명해 진정성이 없었다는 우리를 포함한 미국·중국 등 주변국의 평가와 정반대로 일본인들은 "그 정도면 되지 않았나" "미래 세대까지 과거사 문제로 사과할 필요가 있나"라는 식의 반응을 했다는 얘기다. 담화를 계기로 아베 내각에 대한 지지율까지 상승곡선을 타자 고무라 마사히코 자민당 부총재는 "일본인들이 받아들이기 좋은 담화였다"는 식으로 자화자찬 식 해석까지 내놓았다.
아베 담화 다음날인 15일은 우리의 광복 70주년이었다. 박근혜 대통령은 이날 기념사에서 "앞으로 일본 정부는 역대 내각의 역사 인식을 계승한다는 공언을 일관되고 성의 있는 행동으로 뒷받침해 이웃 나라와 국제사회의 신뢰를 얻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비록 "아쉬운 부분이 적지 않았다"는 전제가 달리기는 했지만 지나치게 후한 평가였다. 물론 박 대통령의 기념사가 경색된 양국관계를 풀기 위한 미래 지향적인 '절제된 반응'이라는 평가도 있지만 바로 전날 아베 총리의 퇴행적 역사인식을 지켜보고 실망한 국민 감정에는 미치지 못했다. 한일의 외교 문제를 감정으로 해결할 일은 아니지만 좀 더 냉정한 평가를 해주기를 바랐던 것이 우리 국민들의 솔직한 심경이었을 것이다.
문제는 아베 담화 이후다. 결국 아베 총리가 내놓은 담화의 골자는 식민지배와 침략의 과거 역사는 덮고 가자는 것이다. 아베 담화 바로 다음날인 15일 여자 독립군의 얘기를 다룬 영화 '암살'이 우리나라에서 1,000만 관객을 돌파했다. 잘 만들어진 영화이기도 하지만 역사적 소재로 다룬 일제 침략사를 경험한 세대의 후손들이 이 부분을 잊지 않고 있으며 공감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이처럼 한일 사이에는 정부 간뿐 아니라 일반 국민들 사이에도 관계개선의 걸림돌로 작용하는 '역사의 정의'와 '오늘의 현실'이라는 딜레마가 존재하고 있다. 이 딜레마를 해결하는 방법은 두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는 것이다. 정부의 공식입장을 내놓는 총리 담화에서조차 수정주의적 역사관을 고수한 일본이 진정한 사죄를 하는 것과는 다른 트랙으로 양국 관계 개선을 진전시켜나가야 한다는 의미다.
당장 아베 담화와는 별개로 한중일 3국의 정상들이 9월 초 베이징에서 열리는 중국의 전승절을 기념해 서로 만날 공산이 크다. 이 같은 분위기 속에서 2012년 이후 중단된 한중일 정상회의도 연내 재개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동북아의 국제 외교, 정치 질서가 급변하는 상황에서 우리만 역사문제에 '올인'해서야 국익을 놓칠 수 있다. 그리고 일본의 식민지배, 침략, 군 위안부 등 역사 문제에 대해서는 잊지 말고 계속된 문제 제기를 해야 한다. 아베 담화로 또다시 꼬이는 한일 관계이지만 '원칙'과 '실리' 둘 다 놓칠 수 없다는 점은 분명하다.
/온종훈 논설위원 jhohn@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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