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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대용 CD 플레이어와 삐삐, 벽돌만큼 큰 휴대전화가 스크린에 등장한다. 1세대 아이돌 그룹 HOT와 젝스키스 등 1990년대 가요계를 풍미한 스타들이 다시 TV 속 주인공이 된다. 77년생 동갑내기 친구들이 모여 90년대 추억담을 거칠고 솔직하게 풀어낸 노래(싸이의‘77학개론’)는 그 때 그 시절을 몸소 경험했던 많은 이들의 공감을 이끌어낸다.
영화·방송·가요 등 대중문화 전반에 걸쳐 1990년대 문화가 되살아나고 있다. 90년대를 떠올리게 하는 소품과 첫사랑의 아련한 추억으로 상반기 흥행작에 등극한 영화 ‘건축학개론’을 필두로 90년대 향수와 추억을 소재로 한 콘텐츠가 각광받고 있다. 지난달 종영한 드라마 ‘신사의 품격’은 1972년생 주인공 4인의 학창시절을 프롤로그로 꾸며 90년대 감성을 자극했다. 케이블 드라마로는 이례적으로 3%가 넘는 시청률을 기록중인 tvN 드라마‘응답하라 1997’은 1990년대 1세대 아이돌 그룹에 대한 팬덤문화를 생생하게 묘사하며 타임슬립(time slip·시간여행)을 경험하게 한다. 28일 첫 선을 보이는 예능프로그램‘내 마지막 오디션’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 가수들의 재기를 위한 오디션으로 1990년대 전성기를 구가한 가수들은 물론 잊혀졌던 가수들이 대거 등장한다. 이처럼 90년대를 소재로 한 콘텐츠들이 꾸준히 제작되고 사랑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구성작가 및 PD, 감독 등 전방에서 콘텐츠를 만들어내는 문화계 종사자들의 연령대에서 해답을 유추할 수 있다. 이들 중 적잖은 수가 90년대 학번 출신으로 자신의 경험담을 진솔하게 녹인 것이 주효했다는 분석이 많다. 또 하나는 90년대 당시 스타들을 사랑했던 세대(20대 후반에서 30대)가 본격적으로 사회에 진출, 경제력을 갖춘 문화소비층으로 떠오른 영향이 크다. 올해 6월 LG경제연구원은 ‘문화와 소비를 주도하는 대한민국 30대의 가치관과 라이프스타일’이라는 보고서에서 “최근 사회 중진세력으로 자리한 386세대들의 뒤를 이어 397세대(30대·90년대 학번·70년대 출생)가 우리 사회의 변화를 주도하는 세대로서 주목 받고 있다”고 분석했다.
그렇다면 왜 하필 90년대가 신(新) 문화 트렌드로 자리한 것일까. 과거‘세시봉 열풍’에서도 알 수 있듯, 통기타로 대변되는 7080세대(70년대·80년대에 대학 생활을 하며 20대를 보낸 세대)문화는 꾸준히 복고의 아이템으로 자리해 왔다. 이 와중에 90년대 향취가 새로운 문화 코드로 부상하고 있는 이유는, 이른바 397세대들의 성향과 당시 사회적 분위기가 한 몫 한다. 오늘날의 30대가 10대, 20대였던 90년대 초반은 탈정치화가 급속도로 진행되는 동시에 경제적 풍요로움이 넘치던 시기였다. 이 같은 사회 분위기 속에서 문화적 풍요로움 또한 넘쳐났고, 대중문화는 밀도 있는 성장을 이루게 된다.
문화평론가 이택광 경희대 교수는“권위주의 정부 시절 저급화 됐던 대중문화 영역이 1990년대 표현의 자유 보장과 여러 개방적 분위기와 맞물려 전무후무한 폭발적 성장을 이뤘다”며 “(90년대 복고 열풍은) 뮤직비디오 사전 등급 심의 제도 등의 말이 나오고 다시 대중문화가 위축되는 듯한 지금의 상황에서 1990년대, 자유주의 문화의 약진이 이뤄졌던 그 시절에 대한 향수가 배어 있다고도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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