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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경제소사/3월26일] <1353> 전쟁 배상금


SetSectionName(); [오늘의 경제소사/3월26일] 전쟁 배상금 권홍우 편집위원 ImageView('','GisaImgNum_1','default','260'); 1526년 3월26일,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가 마드리드에서 풀려났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에게 패해 포로로 잡힌 지 2년 만이다. 프랑스는 국왕을 반겼다. ‘배상금 400만크라운과 영토를 내주면 석방하겠다’는 카를 5세의 제의에 ‘차라리 감옥에서 죽겠다’며 버텨온 국왕은 귀국하자마자 석방조건인 영토할양 무효 등을 선언해 더 큰 기쁨을 안겨줬다. 환희는 오래가지 못했다. 국왕 대신 인질로 잡혀간 여덟 살과 일곱 살짜리 두 왕자를 데려오기 위해 카를 5세와 캉브레조약(1529년)을 맺고 이탈리아와 저지대(네덜란드ㆍ벨기에 지역)에 대한 영향력 포기를 약속할 수밖에 없었다. 가장 큰 고통은 배상금 200만크라운. 1차분으로 넘긴 120만크라운을 헤아리는 데만 4개월이 걸렸다는 배상금으로 스페인은 금화로 넘친 반면 프랑스는 초긴축 기조를 강요 받았다. 양국 경제는 그 뒤 어떻게 변했을까. 프랑스는 번영하고 스페인은 쇠망의 길을 걸었다. 신대륙에서 쏟아져 온 금과 은에 배상금까지 받게 된 스페인의 경제가 망가진 이유는 과도한 지출. 카를 5세뿐 아니라 후계자들도 연이은 군사적 모험의 성공에 취해 끝없는 전쟁을 벌이며 국고를 거덜 냈다. 재정이 흔들리는 상황에서도 넘치는 유동성은 스페인의 소비를 증가시켰다. 고급인력들이 탐험이나 전쟁을 선호한 탓에 마땅한 산업기반을 키우지 못했던 스페인에서의 소비증가는 프랑스 제품 수입증가로 이어지고 돈의 흐름도 뒤바뀌었다. 배상금이 무역을 통해 고스란히 프랑스로 돌아온 것이다. 영국의 철학자 데이비드 흄은 ‘무역균형론(1752)’에서 칼로 불러들인 스페인의 과잉 유동성에 대해 이런 말을 남겼다. ‘적절한 수준 이상으로 돈을 쌓아올리는 것은 액체를 쌓는 것만큼이나 불가능하다.’ 혼자 웃는 김대리~알고보니[2585+무선인터넷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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