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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경제소사/9월1일] 리비아 쿠데타


1969년 9월1일 새벽2시. 어둠 속에서 소리 없이 움직인 군병력이 공항과 정부청사ㆍ방송국을 접수했다. 주도자는 카다피 대위. 통신장교로서 청년자유장교단의 리더였다. 불과 27세의 카다피는 어떻게 피 흘리지 않고 권력을 잡았을까. 부정부패 때문이다. 석유개발권이 헐값에 외국으로 넘어가고 국민의 삶은 개선되지 않는 상황이 쿠데타를 불렀다. 신병치료차 터키에 머물던 리비아 국왕 이드리스 1세가 곧바로 3,000만달러를 인출해 그리스로 망명했다는 점은 부패의 정도를 말해준다. 스스로 대령 계급장을 달고 새롭게 탄생한 리비아공화국의 혁명평의회 의장에 오른 카다피는 석유 이권부터 챙겼다. ‘석유 없이도 5,000년을 살아왔다. 계약을 새로 맺기 싫으면 떠나라’라는 카다피의 배수진에 가장 좋은 광구를 갖고 있던 미국계 옥시덴털사의 몸이 달았다. 결국 옥시덴털은 이익금의 55%를 리비아 몫으로 돌리고 공시가격도 30% 올린다는 조건으로 개발ㆍ채굴권을 간신히 지켰다. 중동에서 산유국 몫이 석유회사보다 많아진 최초의 케이스는 자원민족주의의 씨를 뿌렸다. 미국과 유럽은 불만이었지만 마침 수에즈운하가 폐쇄된데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송유관 사고로 리비아산 원유 가치가 최고조에 달했던 상황이어서 무릎을 꿇었다. 안정된 오일달러 수익을 바탕으로 카다피는 각국의 테러단체를 지원하는 등 서방과 각을 세웠다. 1982년부터 미국의 경제봉쇄를 당한 것도 이 때문이다. 무혈 쿠데타 38주년, 카다피의 권력은 여전히 공고하다. 대량살상무기를 포기하며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복귀한 2003년부터 리비아는 해마다 8%가 넘는 고성장가도를 달리고 있다. 리비아는 우리에게도 중요한 나라다. 풍부한 자원과 북핵 문제를 풀어나갈 ‘리비아 모델’이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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