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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Life] 배우 이순재

"연기는 보석처럼 갈고 닦는 것

돈도 나이도 훌쩍 뛰어넘는 또 다른 창조의 세계죠"



극장으로 등교하던 철학도 영화광
로렌스 올리비에 '햄릿'에 빠져 배우로
배고프고 돈 못벌어도 '예술'에 가치
연극 위해 방송·영화 겹치기 출연까지
후배들 화려한 외양만 좇지 말았으면


# 이마 위로 굵은 가로선이 깊게 자리 잡고 누웠다. 호탕하게 웃는 눈가에도 시간의 자국은 선명하다. 세월은 피부에 주름을 보탰고 머리카락에는 흰 눈이 내렸다. 하지만 용광로처럼 끓어 오르는 열정은 여전히 푸름 봄, 청춘에 머물러 있다. "늙었다고 '나 끝났다' 하고 생각하면 진짜 끝나버리는 것입니다." 깊어지는 주름만큼 TV 드라마와 시트콤, 영화, 연극, 예능 프로그램까지 장르를 넘나들며 더욱더 치열한 시간을 사는 배우 이순재(80)를 연극 '황금연못' 공연이 한창인 대학로의 한 극장에서 만났다.

배우 이순재는 대중에게 드라마나 시트콤, 예능 프로그램으로 친숙하지만 꾸준히 연극작품을 통해 무대에 서고 있다. 올해는 지난 5~8월 고두심과 함께 '사랑별곡'에 출연했고 9월부터는 황금연못으로 관객을 만나고 있다. NG와 편집 없이 이야기를 이끌어가야 하는 연극이 팔순 노배우에게 신체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부담일 법도 하지만 그에게 연극무대는 계속 찾을 수밖에 없는 고향 같은 존재다. 배고파도 '끝을 보겠다'는 다짐과 열정으로 연기인생을 시작한 기반이 바로 연극무대기 때문이다.

◇영화를 통해 연기와 예술을 꿈꾸다=대학에 들어와 만난 전세계의 다양한 영화는 정치가를 꿈꾸던 서울대 철학과 청년 이순재에게 '연기'라는 새로운 세상을 열어줬다.

"1950년대 이후 세계 각국 영화가 쏟아져 들어왔어요. 극장으로 등하교하며 명작에 심취해 있었는데 대학교 2학년 때 영국의 로렌스 올리비에가 나온 '햄릿'을 본 거죠." 인터넷도 없던 시절 자료를 뒤져가며 올리비에의 정보를 모았다. "올리비에는 당시 영국 왕실에서 작위까지 받을 정도로 한 나라를 대표하는 예술가로 인정받고 있었어요. 그를 보며 '이만하면 연기도 예술적 창조행위가 될 수 있겠다'는 확신이 섰어요."

영화광이던 철학도는 대학교 3학년, 학교 연극부에 들어가며 연기와 연을 맺고 재학 중이던 1956년 연극 '지평선 너머'를 통해 배우로서 첫발을 내디딘다.

◇'발 연기'에 꾸지람 듣던 시절=대한민국 대표배우에게도 이른바 '발 연기'로 꾸중 듣는 신인시절이 있었다. 첫 작품의 설렘이 가시기도 전에 부족한 실력이 들통이 났다.

"맡은 배역이 60세 노 선장이었는데 이 사람이 호탕하게 웃으면서 막이 올라가는 거였어요. 근데 웃음이라는 게 평소에는 잘 나오다가도 연기로 하면 호흡 때문에 쉽지가 않거든. 아침 8시에 모여 시작한 연습이 결국 나 때문에 깽판이 났지." 당시 연출가였던 전근영 선생에게 혼쭐이 난 이 신인배우는 학교 빈 강의실로 달려가 밤늦게까지 '미친놈처럼' 소리를 지르고 웃고 노래하며 연습했다. 다음날 그의 연기를 본 연출은 그제야 '비슷해'라는 한마디를 던졌다. 58년 경력의 베테랑 배우에게 그 순간은 '연기하며 만난 첫 시련'으로 남아 있다.

어색한 연기로 호되게 꾸지람을 받은 경험은 배우 이순재에게 교훈을 안겨줬다. "타고난 것만으론 극복할 수 없는 게 연기입니다. 그래서 보석처럼 오랜 시간 갈고 닦아 모양을 내야 하죠" '믿고 보는 배우'의 기반은 그렇게 탄탄하게 쌓여가고 있었다.

◇편견, 반대, 그리고 승낙=마약처럼 끊기 힘든, 아니 끊을 수 없는 게 연기였다. 대학 졸업 이듬해 군대에 간 그는 제대 후 1년간 방송 관련 회사에서 일했지만 역시 '내 길'이 아니었다. 고시를 준비할 수도 있었지만 이미 연기에 미친 그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연기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무작정 고(故) 이해랑 연출을 찾아갔어요. 당시 이 연출이 연극 '로미오와 줄리엣'을 만들고 있었는데 무조건 '남는 배역 있으면 뭐든지 달라'고 부탁을 했죠." 젊은 연극배우의 패기에 이 연출은 '남는 역할'이 아닌 로미오의 친구 머큐시오 역할을 제안했다.

본인의 꿈은 이뤘지만 부모님의 기대는 저버릴 수밖에 없었다. 배우는 예술가는커녕 딴따라나 광대 취급을 받으며 경제적으로도 불안했던 시절. 집안의 반대는 당연했다. 하물며 정치인을 꿈꾸던 명문대 졸업생 아들이었다. "하루 두 끼를 수프로 때우며 무대에 올랐어요. 배고프고 돈 없어도 집에는 연락할 수가 없었는데 어느 날 대전 고향에서 아버지가 찾아오셨더라고." 말을 아끼던 아버지는 '꼭 해야겠느냐'고 물었다. "이것 말고는 길이 없습니다. 시작한 거 끝을 보겠습니다." 아들의 할 말도 이뿐이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아버지는 한마디를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류가 되면 밥은 먹고 살겠지." 아버지가 앉았던 자리에는 용돈이 놓여 있었다. 인정이자 승낙이었다.

◇내가 좇은 건 돈 아닌 예술=연극을 위해 살았다. 출연료라는 개념조차 없던, 아니 줄 돈 자체가 없던 연극판. 그저 연기가 좋았던 그는 연극을 위해 방송이나 영화에 겹치기 출연을 하며 돈을 벌었다. "연극이 좋다고 연극만 하면 먹고 살 수가 없는 환경이었지. 생계를 위해 영화 10편을 동시에 들어가는 경우도 있었고. 이 정도 해야 10년 악착같이 모아 집 한 칸 마련할 수 있었다니까요. 그만큼 당시 출연료가 말도 안되게 적었다는 얘기인데 그 당시 예술에 미친 사람들은 다 이러고 살았죠."

무언가를 향한 목적이 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 배우 이순재는 그 원동력을 '예술성'이라고 부른다.

◇후회·미련없는 정치인 생활=연기로 한우물을 파던 그는 1980년대 초 정계에 발을 내디딘다. 11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 절친한 동료이던 배우 고(故) 이낙훈이 민정당으로부터 비례대표 제안을 받은 일을 계기로 동반 입당한 것.

"문화 분야에 현안이 많았지만 당시만 해도 눈에 안 보이는 문화를 키우느니 벽돌 하나 더 쌓는 게 낫다는 인식이 팽배했죠. 문화정책 기틀을 잡아보자는 마음으로 입당했는데 1988년 13대 선거 때 당에서 나를 중랑갑에 보내더군요. 그때 동네 양반들이 '정치 파워 없는 연예인을 보내는 거 보니 당에서 우리 동네를 버린 거다'라며 불만이 가득했지(웃음)." 결국 700여표 차로 낙선했지만 그의 열정을 알아본 지지자들이 '한 번 더'를 제안했고 4년 뒤 14대 선거에서는 상대 후보를 3,800표 차이로 누르고 당선됐다.

"무슨 일이 생기면 다 내 탓 같아 단 하루도 편하지 않았다"는 정치인 생활. 15대 출마 없이 배우로 돌아온 그는 "낙선·당선 4년씩 8년간 지역 일을 했고 임기 후에도 동네에서 문화원장 5년은 물론 사회복지회 활동도 6년간 무보수로 했다"며 "이 정도면 후회도 미련도 없이 할 수 있는 일을 다한 것 같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정치 잘하는 것도 좋지만 연기 잘해서 관객 즐겁게 해주는 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국회의원 몇 번 더 하겠다고 헤매면 그만한 꼴불견도 없습니다."

◇후배들, 화려한 외양·돈만 좇지 않았으면=전후 허허벌판에서 청소년기를 보냈다. 꿈을 위해 배고픔도 참아야 했던 시절을 겪었기에 물질적 풍요 속에서도 예술이 아닌 수익성만 좇는 배우 지망생들을 볼 때는 안타깝다.

"배우 중에는 영화 한 편 한 뒤 6개월 놀고 광고 한 번 출연하는 식으로 활동하는 부류가 있고 당장 인기나 수익성은 없어도 꾸준히 작품활동을 해 절대 필요한 존재로 가는 부류가 있어요. 그런데 요즘 배우 지망생들의 동경 대상은 대부분 전자란 말이지. 뭐가 좋고 나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전자는 타고난 외모나 관객을 사로잡을 매력이 있는 소수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예요. 본인의 외형, 기타 조건을 보고 어떤 흐름을 타야 하는지 냉정하게 선택하고 공부를 해야 하는데 그게 안되고 있는 게 아쉬운 거죠."

대학에서 수년째 후학을 가르치고 있는 그는 본인의 개성을 살려 열정적으로 연구하고 분석하는 제자들에게 늘 이렇게 말한다고 한다. "이봐, 자넨 평생 해야 해. 돈 못 벌고 나이 먹어도 또 다른 창조의 세계가 있는 거라고."

◇남 아프게 안 하고 살아온 인생 보람=가부장적인 '대발이 아버지(사랑이 뭐길래)'부터 야한 동영상에 빠진 귀여운 할아버지(거침없이 하이킥), 명의 유의태(허준), 카리스마 군주 영조(이산) 등 다양한 캐릭터를 연기한 대배우에게 여전히 욕심나는 배역이 있을까.



"좋은 연기는 좋은 연출을 만나면 저절로 나오게 마련"이라는 그는 "젊은 시절 노인 연기를 많이 하느라 햄릿 역을 못했다"고 아쉬움을 털어놓았다. 그러나 이내 "나이 먹어 햄릿은 어렵겠지만 리어왕은 할 수 있겠지"라며 매력적인 눈웃음을 내보였다. 앞은 생각 않고 오로지 연기에 빠져 산 지 58년. 연기자로서 최종 목표를 묻자 '현답'이 돌아왔다. "연기는 미래를 설정하고 하는 직업이 아닙니다. 꾸준히 좋은 사람들과 좋은 작품을 만드는 게 내 바람이에요." 배우 아닌 인간 이순재의 인생 목표 또한 소박했지만 깊은 울림을 남겼다. "지금까지 살면서 남에게 가슴 아픈 짓 안 하고 출세하겠다고 굽실거리지 않은 게 보람이지. 이런 자세로 계속 일할 수 있을 때까지 하고 싶어요."

He is…

△1935년 함북 회령 △1953년 서울고 △1958년 서울대 철학과 △1956년 연극 '지평선 너머'로 데뷔 △1992년 14대 국회의원 △1998~2011년 세종대 영화예술학과 석좌교수 △2012년~ 가천대 연기예술과 석좌교수

◇수상

△1977년 제13회 백상예술대상 영화 남자 최우수연기상 △2002년 보관문화훈장 △2007년 MBC 연기대상 사극 부문 황금연기상, 방송연예대상 대상 △2009년 제45회 백상예술대상 공로상 △2009년 한국방송영상산업진흥원 '방송인 명예의 전당' 연기자 최초 헌정 △2011년 제20회 금계백화장영화제 남우주연상

◇대표작

<연극> 지평선 너머, 시라노, 세일즈맨의 죽음, 돈키호테, 아버지, 늙은 부부 이야기, 사랑별곡, 황금연못 등

나도 인간이 되련다, 풍운, 사랑이 뭐길래, 목욕탕집 남자들, 꿈의 궁전, 보고 또 보고, 허준, 상도, 토지, 거침없이 하이킥, 이산, 베토벤 바이러스, 마의, 꽃할배 수사대 등

<영화> 밤은 말이 없다, 초연, 막차로 온 손님들, 윤심덕, 비목, 밤의 찬가, 굿모닝 프레지던트, 그대를 사랑합니다 등



황혼기 부부 삶과 사랑 담담히 그려… "인생 반추할 기회되길"

■연극 '황금연못'은

연극 '황금연못'(사진)은 황혼기를 맞은 노년 부부의 삶과 사랑을 담담히 그려낸다. 이순재가 연기하는 노먼은 80세 생일을 앞둔 까칠한 노인이다.

여느 때처럼 여름을 보내기 위해 커다란 호숫가의 황금연못 별장을 찾은 노먼과 그의 부인 에셀. 노먼은 아내를 향해 짓궂은 농담을 던진다. 바닥에 떨어진 인형을 보고는 "나도 저렇게 마무리할까. 세 번째 다이빙을 해도 내가 죽지 않으면 칼로 찔러줘"라고.

고약한 노인은 그러나 정작 죽음(치매)의 그림자 앞에서는 겁먹은 어린아이처럼 한없이 작아진다. "수천 번 당신과 함께 걸었던 길인데 기억이 안 나. 그래서 집으로 돌아왔어. 당신의 예쁜 얼굴을 볼 수 있는 안전한 곳으로."

'쇼' 성격의 공연에 익숙한 관객이라면 밋밋하게 다가올 수 있는 작품. 그러나 티격태격 다투면서도 서로 보듬고 살아가는 노부부의 이야기는 우리 주변의 평범한 인물들이 겪는 익숙한 삶이기에 밋밋함은 편안함으로 다가온다.

배우 이순재가 황금연못을 선택한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그는 "누구나 인생을 지나오며 많은 과정을 겪는다"며 "나이 많은 사람들에게는 자신이 걸어온 길을 반추할 수 있는, 중년들은 '앞으로 내 인생을 어떻게 마무리할 것인가'를 고민할 수 있는 작품이 바로 황금연못"이라고 말했다. "젊은 친구들요? 조부모·부모의 모습을 볼 수도 있고 '늙은이들 노는 거 재밌구나' 하는 생각도 할 수 있는 거지(웃음)."

노먼 역은 이순재와 신구가 함께 연기하고 에셀은 나문희·성병숙이 맡는다. 오는 23일까지 대학로 대명문화공장 1관 비발디파크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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