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로존(유로화 사용 17개국) 경제의 0.2% 규모에 불과한 약소국 키프로스가 글로벌 금융시장에 새로운 뇌관으로 떠올랐다.
키프로스에 긴급자금을 내주는 대신 은행 예금자들에게 부담금을 지우기로 한 키프로스 구제금융안이 앞으로 유로존 구제금융의 '선례'가 될 것이라는 관측을 낳으면서 글로벌 금융시장에 파문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18일 아시아 금융시장은 키프로스발(發) 위기 우려로 크게 출렁였다. 이날 도쿄외환시장에서 유로화 가치는 장중 지난해 12월10일 이래 최저 수준인 1유로당 1.2889달러까지 하락했고 지난주 말 뉴욕시장에서 달러당 96엔대에 머물던 엔화 가치는 오전 한때 달러당 93.45엔을 기록할 정도로 급등했다. 아시아증시도 줄줄이 떨어져 일본 닛케이평균지수는 2.71%, 홍콩 항셍지수도 2%가량 하락했다. 안전자산으로 여겨지는 미국과 일본 국채가격은 일제히 상승(국채금리 하락)했다.
시장이 이처럼 요동친 것은 16일 발표된 키프로스 구제금융안의 파장 때문이다. 앞서 국제통화기금(IMF)과 유로존은 재정위기에 빠진 키프로스에 100억달러를 지원하는 대신 10만유로 이상 예금에 9.9%, 10만유로 미만 예금에 6.75%의 일회성 부담금을 부과하는 내용의 구제금융안을 발표했다.
하지만 예금과세라는 유례없는 전제조건을 내건 구제금융안은 키프로스뿐 아니라 다른 유럽 국가들의 예금과 금융 시스템에 대한 우려로 비화돼 시장을 뒤흔들었다. 국제 채권단은 이번 예금부담금이 일회성 조치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지만 앞으로 키프로스의 선례에 따라 구제금융을 받으려면 예금주에 과세부담을 지워야 하는 게 아니냐는 관측이 제기되고 있다. 국제신용평가사인 무디스도 키프로스 구제금융안이 유럽 은행의 예금자들에게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에 따라 시장에서는 키프로스 구제금융안의 충격파가 키프로스 내 대규모 예금인출(뱅크런) 사태에 그치지 않고 스페인과 이탈리아 등의 예금인출로 번지면서 유럽 재정위기의 불길을 되살릴 수 있다는 우려가 고조되고 있다.
미즈호애셋매니지먼트의 나카무라 히로마사는 "키프로스 사태로 다른 나라에서도 예금인출 사태가 발생할 것이라는 우려가 금융 시스템의 안정을 흔들어놓을 수 있다"며 "시장에 리스크 회피성향이 고조돼 자금이 안전자산으로 향하고 있다"고 말했다.
뉴욕타임스(NYT)도 키프로스의 예금과세는 부실채권 문제를 안고 있는 다른 유럽 국가들의 소형 은행들에 대한 예금주와 투자가들의 위기의식을 부추길 수 있다고 경고했다. 특히 지난해 뱅크런 사태를 겪은 스페인의 경우 키프로스 위기가 전이될까 노심초사하고 있다.
당사국인 키프로스의 혼란도 점입가경이다. 니코스 아나스타시아디스 대통령은 소액 예금자의 손실을 최소화하겠다며 구제금융안에 대한 지지를 호소하고 있지만 거센 여론의 반발 속에 합의안이 의회를 통과할지 여부가 불투명하다. ATM은 몰려드는 예금인출 수요로 이미 현금이 부족한 상태이고 극심한 혼란으로 18일까지로 예정된 은행 임시휴업이 19일 이후까지 연장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키프로스의 경제학자인 알렉산드로스 아포스톨리데스는 "이번 사태의 충격이 단순한 예금이탈로 그치지 않고 그리스처럼 국내총생산(GDP) 급감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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