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년간 혹독한 긴축과 증세정책을 펴온 유럽에 감세 바람이 불고 있다. 이는 막대한 재정적자를 줄이기 위해 증세를 해온 유럽 각국이 기나긴 경기침체 터널의 끝이 보이자 기업 등 민간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도록 성장 쪽으로 정책의 중심을 옮기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 높은 세금부담에 대한 각국 국민들의 반발과 여기에 편승한 극우파의 득세를 막으려는 정치적 의도도 감세의 주요 요인이다.
영국 경제주간 이코노미스트 최신호에 따르면 영국은 최근 발표한 2014~2015회계연도 예산안에서 소득세 과세기준을 현재의 9,440유로에서 1만유로로 높이는 등 국민의 소득세 부담을 완화하고 나섰다. 39세의 역대 최연소 총리가 집권한 이탈리아에서도 과감한 감세정책이 도입되고 있다. 마테오 렌치 이탈리아 총리는 12일(현지시간) 경기부양을 위해 124억유로 규모의 감세를 실시한다고 밝혔다. 아일랜드와 스페인 등도 올해 말 감세를 추진하고 있는 등 유럽 국가들 사이에서 감세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이러한 감세의 진앙지는 아이러니하게도 좌파인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이 이끄는 프랑스다. 영국 경제주간 이코노미스트 최신호에 따르면 1월 프랑스 정부는 기업이 근로자에게 주는 급여에 부과하는 인두세를 총 300억유로 감면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유로존(유로화 사용 18개국) 경기가 미약하게나마 살아나고 있지만 유독 프랑스만 뒤처지자 증세와 복지지출 확대를 표방하는 좌파정부가 감세 쪽으로 돌아선 것이다. 올랑드는 집권 초기만 해도 소득세 최고세율을 75%로 올리는 등 부자증세를 추진해 국민들의 반발에 부딪쳤다.
유럽위원회(EC)는 "2008년 유로존 국내총생산(GDP)의 45%였던 역내 총세수가 재정위기를 거치며 47% 선까지 확대됐으나 지난해 정체를 보였고 올해부터는 하락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 같은 감세기조는 민간의 세 부담을 경감시키지 못할 경우 견조한 성장세를 보이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한 데 따른 것이다.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와 2010년 유럽 재정위기를 거치며 유럽 각국은 케네스 로고프 하버드대 교수 등의 지적처럼 일단 국가부채를 줄여야 위기에서 헤어나올 수 있다고 판단해 세율을 높이며 재정적자를 메워왔다. 이 덕분에 2010년 3·4분기 GDP 대비 7%를 넘어섰던 유로존 재정적자 규모는 지난해 3·4분기 현재 3.1%로 크게 낮아졌다. 하지만 이제는 과도한 세 부담이 유럽 기업들의 발목을 잡고 있으며 부자들을 세율이 낮은 다른 국가로 내모는 상태다.
또 유로존 실업률이 12%로 사상 최고 수준까지 치솟은 가운데 세금에 대한 각국 국민들의 불만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는 점도 감세를 부추긴다. 최근 치러진 프랑스 지방선거에서 우파인 국민전선(FN)이 약진한 사례에서 보듯 유럽 내 감세와 반이민을 표방하는 우파가 득세하고 있다.
씨티그룹의 유로존 이코노미스트인 주엘라룸 메뉴에트는 "단일화폐인 유로를 쓰는 유로존의 특성상 각국은 경기부양을 위해 독자적으로 화폐가치를 떨어뜨리거나 기준금리를 낮추지 못해 결국 감세 카드를 추진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