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흔히 '다르다'와 '틀리다'는 말을 같은 의미로 사용하곤 한다. '다르다'는 것은 두 개 이상의 사물이 '같지 않다'는 뜻이고 '틀리다'는 거기에 판단의 잣대가 더해져 '옳지 않고 그름'을 나타낸다. 문제는 단순히 단어를 헷갈려 쓰는 것뿐 아니라 '다르다'와 '틀리다'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마음가짐이다.
그리스 신화에 보면 프로크루스테스라는 인물이 나온다. 그는 아테네 교외에 집을 짓고 살면서 강도질을 했는데 그의 집에는 철로 만든 침대가 있었다고 한다. 침대의 용도는 섬뜩하게도 사람을 죽이기 위한 것이었는데 지나가는 행인을 붙잡아 강제로 눕히고는 그의 키가 침대보다 크면 잘라내고 반대로 작으면 억지로 길이에 맞춰 늘여서 죽였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침대에는 숨은 조절장치가 있어서 실은 침대에 키가 딱 맞는 사람은 존재할 수가 없었다고 전해진다. 자신의 침대에 행인들의 키를 맞추려고 했던 프로크루스테스처럼 살다 보면 나의 생각이나 의견을 '맞고 틀림'의 잣대로 적용하는 오류를 범하곤 한다. 그러다 보면 나와는 다른 생각이나 다른 성향의 사람을 '틀리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맞고 틀림을 주장하는 잣대는 '객관성'에 기인하는 경우가 많다.
세상의 대다수가 나와 의견을 함께 한다는 논리로 무장된 객관성은 오히려 세상을 더욱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흑백논리에 빠지게 만든다. 물론 삶속에서 객관적인 논리가 필요한 경우가 있다. 하지만 늘 그 규칙과 논리가 맞아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논리는 삶의 사소한 일부일 뿐이고 게다가 삶은 늘 규칙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단조로운 흑백이 아닌 다채로운 컬러로 삶을 채우는 비결은 바로 '다름'을 인정하는 데에 있다.
필자의 고향은 강원도인데 이 추운 겨울 무렵이면 화천에서 산천어 축제가 열린다. 올해도 '얼음나라 산천어축제'가 성황리에 열리고 있는데 얼마 전 재밌는 이야기를 듣게 됐다. 산천어와 송어라는 물고기는 원래 같은 종이라는 것이다. 알에서 부화한 산천어는 1년 동안 성장하면 바다에 나갈 준비를 하는 그룹과 하천에 남는 그룹으로 나눠 진다고 한다. 이중 바다로 나가는 그룹이 '송어', 그리고 남는 그룹이 '산천어'가 된다. 송어는 바다에 나가 생활하다가 산란시기가 되면 다시 하천으로 돌아와 산란한 후 죽음을 맞는다. 본래는 하나의 종이지만 서로 다른 생활 방식과 터전을 택한 송어와 산천어는 두 개의 이름을 가지고 공존하는 방법을 택한 셈이다.
기왕이면 '다름'을 인정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틀림'을 인정하는 방법도 배웠으면 좋겠다. 옳고 그름의 판단이 개입됐을 때 자신의 주장만이 옳다고 말하는 것은 고집과 아집으로 이어지기 쉽다. 항상 내가 맞고 당신이 틀린 것이 아니라 내가 맞을 수도 혹은 틀릴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내가 틀리고 당신이 맞는 경우가 생기는 것이 바로 삶이다. 나의 틀림 또한 인정할 줄 알아야만 다른 사람과의 대화도 가능하고 그 안에서 새로운 발전도 이뤄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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