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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민주화 운동 큰별 지다

김근태 민주통합 상임고문 타계<br>열차례 고문 후유증으로<br>60년대 서울대 재학시절<br>반독재 민주화 운동에 투신<br>15대 총선 이후 내리 3선

한국 민주화운동의 큰 별이 졌다.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30일 오전 향년 64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김 고문은 이날 오전5시31분 뇌정맥혈전증과 2차 합병증이 겹치며 패혈증으로 숨을 거뒀다. 김 고문은 지난 2007년 파킨슨병 진단을 받아 약물치료를 받아왔다. 민주화운동을 하던 1985년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받은 열 차례 고문의 후유증이 영향을 미쳤다는 게 일반적 시각이다. 1947년 2월 경기도 부천에서 태어난 김 고문은 1960년대 서울대 재학 시절부터 반독재 민주화운동에 몸을 던졌다.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 고(故) 조영래 변호사와 함께 당시 '서울대 운동권 3총사'로 불리기도 했다. 손 전 대표는 김 고문이 숨을 거두기 전 트위터에 "근태야. 꼭 가야 되겠니. 다시 좀 일어설 수 없겠니"라는 글을 남기며 안타까움을 나타내기도 했다. 김 고문은 1967년 서울대 상대 학생회장 당시 총선과 대선 부정선거에 항의하다 제적당했고 군대에 강제 징집됐다. 1970년 복학한 김 고문은 이듬해 서울대생 내란음모 사건에 연루돼 지명수배를 받았으며 1983년에는 민주화운동청년연합을 결성하기도 했다. 1985년에 투옥된 김 고문은 '고문 기술자'인 이근안에게 여덟 차례의 전기고문과 두 차례의 물고문을 받았으며 이로 인해 평생 동안 고문후유증에 시달려야 했다. 그는 "스스로 죽고 싶었다"고 말할 정도로 악몽같았던 고문경험을 담은 책 '남영동'을 냈으며 2004년에는 복역 중이던 이근안을 직접 면회해 "용서한다. 건강하시기를 빈다"는 말로 역사적 용서를 했다. 1994년 김 고문은 제도권 정치로 눈을 돌렸다. 당시 민주자유당에 반대하는 세력을 결집하는 민주연합정당을 만들기 위해 통일시대민주주의국민회의의 공동대표를 지냈다. 1995년에는 당시 김대중 총재가 이끌던 새정치국민회의 부총재를 맡으며 본격적인 정당활동을 시작했다. 또 1996년 15대 총선에서 서울 도봉갑에 출마해 당선된 후 17대까지 내리 3선에 성공했다. 하지만 2008년 18대 총선에서 정치 신인인 신지호 당시 한나라당 후보에게 1.8%포인트 차로 아깝게 낙선했다. 민주통합당은 이날 오전 최고위원회의에서 "이 시대 민주화의 진정한 운동가 김근태 고문이 부디 국가 폭력과 고문이 없는 하늘에서 평안하기를 기도한다"며 조의를 표했다. 한명숙 전 국무총리 등 당권 후보를 비롯해 소속 의원들도 일제히 빈소를 찾아 합동 조문했다. 박근혜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장은 이날 오전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기자들과 만나 "(김 고문의 죽음에 대해) 깊은 조의를 표하고 명복을 빌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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