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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 많은 실리 외교 달인… 보수·군부와도 관계 원만

■ 로하니는 누구<br>후보 중 유일한 이슬람 성직자<br>핵개발 중 서방 제재 피하기도

하산 로하니 이란 대통령 당선인은 '외교의 달인(Diplomat Sheikh)'이라는 평가를 받는 대표적인 중도파 인사다. 그는 실리를 중시하는 유연한 외교노선 탓에 서방 외교관들의 신뢰를 받고 있다. 아울러 아야톨라 호메이니와 함께 이란 혁명을 주도한데다 이번 대선 후보 가운데 유일한 이슬람 성직자라는 경력 덕분에 이란 보수ㆍ군부 강경파와도 두루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특이한 인물이다.

로하니 당선인은 최고국가안보위원회(SNSC) 의장, 대통령 국가안보자문, 핵협상 수석대표 등 이란 외교안보를 총괄하는 지위를 두루 거치며 화려한 경력을 쌓았다. 특히 지난 2003년 핵협상 수석대표를 맡았을 당시 우라늄 농축을 일시 중단하는 유화 제스처로 국제사회의 제재를 피하는 데 성공해 이목을 끌었다. 사데크 지바칼람 테헤란대 정치학 교수는 "당시 로하니는 핵개발을 진행하면서도 서방의 제재도 피하는 외교적 역량을 발휘했다"고 평가했다.

특히 2005년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대통령 취임 이후 대통령과 수차례의 논쟁 끝에 핵협상 수석대표 자리에서 물러나면서 중도파 인사로 입지를 굳혔다. 아마디네자드의 강경기조와 양보할 것은 양보하면서 제재를 피해 핵개발을 지속하겠다는 그의 유화노선이 충돌한 것이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이 같은 경력을 바탕으로 "로하니가 정치적 개방 및 서방과의 관계개선에 중점을 둘 것"이라면서 "서방 외교가에서는 경험 많은 외교관이자 말이 통하는 상대로 보고 있다"고 평했다.

로하니는 개혁ㆍ중도파 연대의 단일주자이면서도 이번 대선의 최종 후보 6명 가운데 유일한 이슬람 성직자이기도 하다. 그는 1948년 이란의 셈난주 소르케에서 태어난 뒤 10대부터 성직자 공부를 시작했다. 1970년대에는 친미 세속주의 성향의 팔레비 왕조에 맞서 '샤(국왕) 반대'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가 반체제 인사로 지목됐다.



이후 로하니는 당국의 체포를 피해 달아난 프랑스에서 '이란 혁명의 아버지' 호메이니가 이끄는 혁명 주도세력에 동참하게 된다. 이때 현 최고종교지도자인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와 중도파의 중심인물이었던 악바르 하셰미 라프산자니 전 이란 대통령과 연을 맺기도 했다.

이 같은 인연을 바탕으로 1979년 이란 혁명 이후 정부조직에 참여했다. 1989년부터 2005년까지 16년간 SNSC 의장을 지냈으며 라프산자니와 모하마드 하타미 대통령 집권기에 걸쳐 대통령 국가안보자문직을 맡는 등 요직을 역임했다. 특히 SNSC에서는 최고종교지도자 하메네이의 대리인 역할을 하며 보수적인 성직자 및 군부 강경파와도 두루 친분을 과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로하니는 2007년 아마디네자드 대통령과의 대립으로 공직을 떠난 후에도 2009년 당시 이란 청년층이 주도한 반정부 운동인 '녹색물결'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 등 폭넓은 정치적 행보를 보이며 중도파 세력의 유력한 대선후보로 떠올랐다. 그는 1969년 결혼해 슬하에 2남1녀를 뒀지만 장남은 1992년에 자살한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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