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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는 자연을 반영하고 문명을 투사한다. 강원도 삼척시 원덕읍 월천리의 솔섬, 오밀조밀 모여있는 소나무들은 단출하다. 하늘과 바다 뿐인 외딴 섬에 물에 비친 나무 모습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일본 홋카이도 누마카와에서 발견한 나무는 흰 눈밭에 홀로 서 있지만 눈과 햇빛을 온몸으로 끌어안아 스스로 빛을 발하고 있다. 홋카이도의 설원에서 발견한 쿠샤로 호수변 나무는 세월과 바람에 몸을 맡긴 채 굽이쳐 그 자체가 한 점의 여백 많은 수묵화를 이루고 있다. 눈발에 가리워 희끄무레한 해를 배경으로 한 숲은 흡사 큰 붓으로 그은 먹선의 묘한 번짐을 보는 듯하다. 자연이 그린 숲인데도 말이다. 위풍당당 어깨를 편 러시아의 나무들, 왈츠를 즐기듯 리드미컬하게 줄지어 선 오스트리아의 나무, 사색에 잠긴듯한 영국의 나무와 여유로운 이탈리아의 나무, 고집스러운 중국의 나무까지. 이들은 풍경을 통해 문화의 정체성을 포착해내는 능력에 관한 한 신(神)이라 불리는, 영국출신 사진작가 마이클 케나(58)의 작품이다. '철학자의 나무'를 주제로 한 그의 개인전이 12일부터 3월20일까지 삼청동 공근혜갤러리에서 열린다. 케나는 2007년에 찍은 사진 한 장으로 월천리 솔섬을 개발 위기에서 구해낸 일로 한국과 인연이 깊다. 솔섬은 단숨에 출사 성지(聖地)가 됐고 하셀브라드(케나가 즐겨쓰는 중형 카메라)를 든 사진애호가들이 몰려들었다. "해안선 프로젝트를 위해 바닷가를 따라 걷다가 우연히 카메라를 돌려 찍은 사진이었어요. 내 작품의 상당수는 우연한 발견이 많아요. 보물은 찾아다니는 사람의 눈에 띄게 마련이고 어떤 목적을 향해 나아가되 열린 마음을 갖고 있으면 발견하게 되는 거죠. " 그의 명상적인 사진들은 법정스님의 잠언집 '살아있는 것은 다 행복하다'의 배경으로도 수록됐다. 사진이지만 동양화 같고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풍경 그림 같다. 그림과 판화, 그래픽을 공부한 영향이다. 종교에 관한 한 개방적이지만 흑백의 아날로그 사진, 가로세로 10인치를 벗어나지 않는 작은 사각형의 프레임은 고집스럽게 지켜간다. "시야각이 35도에 불과한 사람들을 사진 가까이로 불러들이기 위해 최적의 사이즈를 택한 것이죠. 그 친밀감(intimacy)이 중요합니다. 사람이 등장하지 않는 풍경이지만 이것은 공연이 끝난 뒤 무대에 남은 흥분의 흔적처럼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역사'를 이룹니다. 풍경과 사람의 관계를 얘기하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케나의 작품은 그 섬에 가고 싶게, 숲길을 걸어 들어가게, 지평선 너머를 상상하게 만든다. 국가별 문화적 정취를 예리하게 포착하는 탁월한 능력이 이번에는 본격적으로 한국을 겨냥한다. "문화를 분석하려 들지 않고 그 나라 사람처럼 행동하며 자연스럽게 반응하는 것"이 비결이라는 그는 올 겨울 강원도와 남해안을 느린 걸음으로 돌아다닐 계획이다. 이번 전시에는 솔섬과 태안반도 사진 2점만 전시됐지만 내년 하반기께는 한국 풍경사진전을 기대해도 좋다. (02)738-77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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