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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서 두 시간 거리, 추자도 뱃길은 온순했다.
미풍은 불었지만 바다는 고요했고 하늘은 구름 한점 없었다. 기자는 제주에서 관노로 생을 마감한 대역죄인 황사영(17세에 급제한 후 조정의 천주교 박해를 막기 위해 프랑스에 함대를 파견해줄 것을 요구하는 백서를 작성했는데 이것이 발각돼 1801년 처형됨)의 처 정난주 마리아(정약현의 딸)가 귀양을 떠나온 길을 거슬러 가고 있었다. 풍광과 이야깃거리를 취재하러 가는 가벼운 마음으로는 황사영의 유일한 피붙이를 낯선 섬 추자도에 버린 어미의 심정을 헤아릴 길이 없었다. 하지만 그 버려진 아이 황경한의 자손이 추자도에 생존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떠나온 터라 섬에 당도할 때까지 가슴은 내내 두 방망이질을 쳤다.
◇추자도의 풍광=후풍도로 불리던 이 섬이 추자도라는 이름을 가진 것은 영암군에 편입되면서부터라는 설이 유력하다. 하지만 지난 1910년 섬은 제주로 편입됐다. 그래서인지 주민들의 말씨에는 제주도 방언보다 전라도 사투리가 묻어났다.
김재근 추자면사무소 주무관은 "식량 및 생필품은 가까운 전라남도 목포 등지에서 조달한다"며 "주민들도 정서상 제주보다는 전라도를 가깝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추자도는 지리적으로 상추자도·하추자도·횡간도(橫干島)·추포도(秋浦島) 등 4개 유인도 및 38개 무인도로 이뤄졌다. 이 중 상추자도(1.5㎢)와 하추자도(3.5㎢)가 본섬에 해당하며 나머지 도서는 면적이 1㎢ 미만이다.
관광객들에게는 제주도에 묻혀 존재감이 없는 편이지만 추자도는 낚시꾼들 사이에서는 강성돔의 손맛으로 유명하다. 주민들에 따르면 추자도에는 다금바리를 제외한 모든 어종이 풍부한데 겨울에는 주로 감성돔과 학꽁치, 봄에서 가을까지는 황돔·흑돔·농어 등이 잘 잡힌다.
기자가 찾은 날에도 '나바론 바위' 아래 해변에서는 낚시꾼들이 연신 학꽁치를 잡아 올리고 있었다. 추자도는 섬을 둘러싼 갯바위들이 거의 모두 포인트라고 할 만큼 낚시로 유명하지만 곳곳에 깃든 이야깃거리도 풍부하다. 면사무소 인근에는 제주도기념물 11호로 지정된 최영 장군 사당이 있는데 장군이 섬 주민들에게 어망을 만들고 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줘 이를 기리기 위해 사당을 지었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여름에는 신앙리 뒤편 작지 몽돌밭 해수욕장이 인기를 끈다. 이곳에서는 바닷속에서 차가운 샘물이 솟구쳐 더위를 식힐 수 있다고 한다. 이밖에 등대홍보관·관탈섬·사수도도 둘러볼 만하다.
◇황사영의 흔적들=신유박해로 천주교가 위기에 처하자 황사영은 베이징에 있는 프랑스 주교에게 서찰을 보냈다. 교회를 재건하고 포교의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프랑스 함대를 파견해 조선 정부에 압력을 가하는 것이 좋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 사실이 발각돼 황사영은 처형됐다. 조정은 천주교에 대한 탄압을 강화했고 이는 피의 순교로 이어졌다. 황사영의 백서는 현재 로마교황청에 보관돼 있다. 제주로로 귀양 가는 뱃길에서 정난주 마리아는 자신의 품에 안긴 아이가 대역죄인 황사영의 아들이라는 것이 알려지면 아이도 목숨을 부지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배가 추자도에 잠시 정박한 틈을 타 아이를 예초리 황새바위 사이에 숨겨놓고 떠났다. 아이는 근처에서 소에게 꼴을 먹이던 오씨 부부에게 발견돼 그들이 거두었다. 정난주는 피붙이의 배냇저고리 옷깃에 아이의 내력을 기록해놓았고 섬 사람들은 그 아이의 근본을 알 수 있었다. 황경한은 섬에서 자라 생을 마감한 후 하추자도에 묻혔고 200년이 지나 그의 무덤 앞으로 올레길이 생겼다.
기자는 새로 난 올레길을 따라 추자도 예초리에 사는 황경한의 6대손 황인수(68)씨를 찾았다. 황씨는 바닷가에서 부인과 톳을 말리고 있다가 기자를 맞았다. 연로한 탓인지 그의 기억에는 선조의 수난과 핍박과 관련한 이야기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나마 추자도에서 문화관광 해설을 맡고 있는 이태재씨를 만난 것이 행운이었다. 이씨는 "황경한을 발견한 오씨 부인은 출산하지 않았는데도 황경한에게 젖을 물렸더니 젖이 나왔다는 얘기가 전해온다"며 "오씨 부부가 있던 곳도 황경한의 울음소리를 도저히 들 수 없는 위치인데 젖먹이의 울음소리를 들은 것 또한 기적"이라고 말했다.
황경한이 오씨 집안에서 자라난 까닭에 지금도 추자도에서는 황씨와 오씨가 혼인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씨는 "정난주의 묘가 커 합장묘라고 추정한 나머지 부장품 등을 확인하려 했으나 집안의 반대로 손을 대지 않았다"며 "황경한 발견 당시 내력이 기록돼 있던 옷은 45년 전 화재로 불에 타버렸다"고 사라진 사료를 아쉬워했다.
/추자도 = 글·사진 우현석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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