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을 포기한 사람을 뜻하는 ‘수포자’라는 신조어는 문과냐 이과냐를 고민하는 고등학생들에게는 단 1초만에 진로를 결정하게끔 돕는 마법의 단어로 통용된다. 수학을 포기했으면 문과, 그렇지 않다면 이과를 선택하면 된다는 공식인 셈이다. 문학, 사회 과목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수학이 두렵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결과를 받아들이는 학생들 중에는 남학생보다 여학생이 월등히 많다는 통념도 있다. 내 주변만 놓고 보자면 어느 정도 맞는 얘기다. 이런 환경 때문일까. 수학 태교 뉴스에 많은 사람들이 충격받았지만 나는 크게 놀란 편은 아니었다. 수학이란 과목을 향한 막연한 두려움 때문에 수많은 선택지를 너무 쉽게 포기하고만 쓰라린 패배의 경험. 과거의 그 경험을 뱃속의 아이에게만큼은 대물림하고 싶지 않다는 강한 의지(?) 정도로 이해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수학자 에드워드 프렌켈은 저서 ‘내가 사랑한 수학’에서 “시인 한스 마그누스 엔첸스 베르거는 ‘지적이고 교양 있는 사람들조차 수학은 흥미를 잃게 만든 순수한 고문 혹은 악몽’이라 말했다”고 소개했다. 그러면서 그는 이런 수포자 양산의 주된 원인이 잘못된 수학교육 방식 때문이라고 일갈한다. 피카소나 마티스 같은 세계적 예술가의 그림을 한 번도 본 적 없는 이가 예술의 가치를 제대로 알아보는 심미안을 가지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의 수학교육 방식은 어떤가? 마치 피카소의 피자도 들어보지 못한 사람에게 예술의 아름다움을 느끼라 강요하는 격으로 무턱대고 수학 사랑을 압박하고 있다.
물론 ‘수학의 진가를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 해도 상관없다, 사칙연산만 할 줄 알면 사는데 아무 지장 없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런 논리 역시 스스로를 위한 변명일 가능성이 크다. 내 집 장만을 위해 은행에서 대출을 받을 때도 심지어 소비자 물가 지수에도 수학이 사용된다. 먹고 입고 자는 일상생활환경에서도 수학이 적용되는 사례는 무궁무진하다. 그런데도 ‘사는 데 지장 없는 거 아니냐’고? 남이 결정한 대로, 소수가 본인에게만 유리하게 공식을 만들어 낸다 해도 상관없다면 수학은 배울 필요도 없다. 물론 그런 사람은 없겠지만.
프렌켈은 한술 더 떠 ‘수학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 자유가 없다’고 말했다. 수학적 소양이 높은 사회에서는 밀실 거래가 훨씬 적게 일어나며 무지로 인한 피해에서 자기 자신을 보호하려면 수학이 필수라고 덧붙였다.
수학 태교가 처음 보도되었을 때 연관 기사는 죄다 극성 엄마와 관련된 것들 뿐이었다. 한국의 극성 엄마가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에게 수학 공식을 읽어주며 탁월한 아이로 키워 내려 한다는 식의 보도. 그러나 ‘수학 태교’라는 자극적인 헤드라인을 가지고 ‘예비 엄마의 교육방식이 옳으냐 그르냐’만 떠들고 나면 그걸로 끝인가. 엄마가 학교를 졸업한 지 수십 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그 엄마의 아이가 수학에 대한 흥미를 잃을 수밖에 없는 교육현장을 방치한 책임은 왜 아무도, 누구에게도 묻지 않는가. ‘수학 교육은 무엇이며 제대로 이뤄지고 있는가’라고 묻고 현실을 바로잡을 기회를 또 한번 놓친 건 아닌지, 더 늦기 전에 돌아봐야 할 때다.
/김나영기자 iluvny23@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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