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흐르듯 거침없이 해법을 제시하는 모습은 그가 한국 경제를 이끌던 10년 전과 달라진 게 없었다. 관직을 떠난 뒤 풍부해진 현장경험은 더 매끈하게 논리를 뒷받침했다. 권오규(64·사진) 전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현 KAIST 금융전문대학원 교수)은 한국 경제의 현주소와 미래를 정확히 짚어냈다. 지난해 12월21일 KAIST 서울 홍릉캠퍼스 연구실에서 만난 권 전 경제부총리는 "(우리나라) 잠재성장률이 2%대로 떨어진 것 같다. 2%대로 떨어지면 1인당 국민소득 3만달러로 가기 쉽지 않은데 1%대까지 떨어지면 우리나라는 3만달러짜리 국가로 주저앉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의 걱정은 "(잠재성장률 하락으로 1인당 국민소득이) 이탈리아도, 일본도 반대방향으로 간 지가 꽤 됐다"며 "우리도 내려갈 가능성이 농후하다"고까지 나아갔다. 그에게 저성장을 비롯한 우리 경제의 당면과제와 해법을 들어봤다.
첫 번째 과제인 저성장 탈피를 위해 권 전 경제부총리가 꼽은 해법은 고여 있는 자본을 투자로 이끌기 위한 '규제개혁'이었다. 규제개혁 영역은 노동, 수도권 토지, 서비스산업으로 축약된다.
그는 규제완화를 통해 인도 구자라트주 성장률을 12년간 9%로 유지했던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를 비교했다. 그는 "2%대의 잠재성장률을 높이는 방법은 핵심 규제를 개혁해 자본을 가진 대기업이 투자하도록 길을 열어주는 것"이라며 "모디 개혁안 중 가장 큰 게 노동인데 44개 법안을 네 개로 줄여 완전히 유연성을 높였다. 우리 노동개혁은 모디 개혁 수준에 비하면 5분의1도 안 된다"고 말했다.
권 전 경제부총리는 "인도는 낙후된 인프라를 늘리기 위해 토지 수용을 원활하게 하는 방향으로 규제를 대폭 걷어냈다"며 "우리도 농지와 산지에 대한 규제를 덜어내 활용도를 어떻게 높일 수 있느냐 생각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서비스산업, 특히 의료 분야에 대해서는 "규제에 갇혀 있다"고 평가했다. 그는 "우리나라 병·의원 중 영리로 운영되는 곳이 53%가 넘는다"며 "이런 상황에서 (영리의료법인을 막는) 규제를 가지고 있다는 게 말이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우리나라는 오는 2017년부터 생산가능인구가 감소하는 등 고령화에 따른 부작용을 가장 압축적으로 겪고 있는 나라 중 하나다. 권 전 경제부총리는 인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무엇보다 전향적 이민정책을 강조했다.
그는 "선진국 가운데 이민 없이 선진국이 된 유일한 나라가 일본인데 일본은 우리가 절대 본받아서는 안 될 나라"라고 지적했다. 이어 스웨덴을 사례로 들며 "전쟁 등으로 스웨덴은 전체 인구의 40%가 나라를 떠났지만 전후 복구로 쌓은 자본을 통해 복지제도를 도입하고 적극적인 이민정책을 펴면서 인구를 380만명에서 1,000만명으로 늘렸다"고 소개했다. 그는 "이민 1세대 통계를 보면 선진국 여러 나라가 평균 12%"라며 "우리나라는 현재 외국인 인구가 180만명인데 12%(600만명)까지 늘리기 위해 420만명을 데려오면 7% 성장도 가능하다"고 역설했다. 가사도우미, 외국어 선생님, 농업 계절근로자 등의 수요도 있다.
노동의 질적 개선을 위해 그는 "철저하게 현장중심의 교육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권 전 경제부총리는 프랑스의 엘리트식 교육제도인 그랑제콜 시스템을 예로 들며 "프랑스 그랑제콜은 교수진의 절반이 기업의 기술담당 책임자다. 그런 교육 시스템에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위성 아리안, 항공기 에어버스, 전투기 미라주가 나오고 테제베와 원자로로 유명한 알스톰 같은 기업이 나오는 것"이라고 말했다.
권 전 경제부총리가 두 번째로 꼽은 우리 경제의 과제는 '부채'다. 그는 "가계부채를 추가로 늘리는 것은 '올스톱'해야 한다"며 "주택경기를 살리기 위해 이쪽을 텄는데 더 트면 어렵다. 이것을 추스르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재정이 건전성은 지켜야 모든 문제를 해결해나갈 수 있다"고 강조했다. 정부 부채 관리를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것으로는 복지·재정 분야에 분명한 그림을 그리고 가는 것"이라며 "복지는 소득이나 재산조사를 면밀하게 해 필요한 사람에게 더 많이 가도록 해야지 보편적으로 가는 것은 맞지 않다"고 말했다.
부족한 세입을 충당하기 위해서는 부가가치세를 올리는 등 증세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부가세가) 유럽 북구는 23%, 프랑스는 19.6%, 독일은 17%인데 우리는 언제부터 10%냐"며 "1% 올리면 5조6,000억원이 확보된다. 다른 길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환경세, 담배·술 등 죄악세도 올려 부족한 재정을 채워야 한다고 덧붙였다.
'구조조정'은 권 전 경제부총리가 세 번째로 꼽은 과제다. 과거 구조조정을 진두지휘했던 전문가다운 실무적 조언을 쏟아냈다. 그는 "산업은행 등 국영기업은 절대 안 움직인다. 이들을 움직이게 하는 방법은 딱 하나, 장관회의 결정을 공문으로 통보해 (결과가 좋지 않을 경우에도) 면책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현재의 구조조정에 대해서는 "서별관회의에서 얼마나 다루는지, 결과를 공문으로 통보하는지 그게 아쉽다. 그렇게 하면 신속하게 속도가 붙을 텐데"라며 안타까워했다.
그는 시중은행을 압박해 구조조정 펀드를 조성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구조조정 자금은 은행이 아니라 투자은행(IB)이 시중자금을 끌어오는 구조를 짜줘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자본이 충실하고, 구조조정 경험이 많고, 국제적 네트워크를 갖춘 주체가 필요한데 국내에서는 눈에 띄지 않는 게 문제"라며 "통합도산법 등 제도상 결함도 고쳐야 한다"고 지적했다.
권 전 경제부총리는 "삼성의 넥스트에 대한 걱정이 많다"며 네 번째 과제로 '신산업과 신시장 개척'을 꺼냈다. 우리나라에 우수 인력이 갖춰진 반도체·바이오산업의 성공 가능성을 가장 높게 봤다.
그는 "의과대학과 약학대학에 국내 최고 인재들이 갔고 기술 연구개발(R&D) 능력은 세계 최고 수준"이라며 "반도체·바이오산업 등 이미 기존 제조업에서 고부가가치를 찾은 하이엔드 제품을 개척해야 한다"고 말했다.
의료·교육·엔터테인먼트 등 '하이밸류드(high-valued)' 서비스 산업도 공략할 만하다. 그는 "중국 톈진 빈하이신구에는 의료·교육 기업이 없다. 우리가 영리법인을 빨리 도입해 세계적인 대형 병원을 경인자유구역에 유치해야 한다"며 "중국은 유니버설스튜디오 같은 고가의 엔터테인먼트가 들어설 소득수준이 아직 안 되는 만큼 이런 분야에서는 우리가 충분히 비교우위를 가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신시장 개척을 위해서는 중국이 주도하는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을 적극 활용하라고 조언했다. 권 전 경제부총리는 "필리핀 등 인구가 많고 고도성장의 맛을 본 나라를 공략해야 한다"며 "AIIB에 동조해 같이 가야 한다"고 말했다.
/정리=김상훈기자 ksh25th@sed.co.kr
사진=권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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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이연선 경제부차장 bluedash@s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