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비행기 116대를 잃고 항공모함 3대가 파손됐다. 이에 사이먼 버크너 중장 통솔 아래 미군 6만 명이 일본 남해 오키나와 섬에 상륙했다. 1945년 4월 1일의 일이다.
일본 열도를 구성하는 4개 섬 중 가장 남쪽에 해당하는 규슈. 그곳에서도 약 560km를 더 가야 나오는 섬이 오키나와다. 미군은 오키나와를 육군과 공군의 작전기지로 삼아 일본 본토 돌격에 나설 작전이었다. 1,300대가 넘는 배가 4월 1일 당일 6만 병력을 실어 날랐다. 미군은 비행장 두 개를 포획, 빠른 속도로 오키나와 허리 부근까지 진입해다.
오키나와 상륙 이전까지만 해도 미국은 지상전 전투를 벌이지 않았다. 지상전이 벌어지자 일본은 새로운 전략을 세웠다. 바닷가에서 미군에 맞서 싸우기보다 미군을 섬 안 쪽으로 유인한 것이다. 일본군의 전략은 해변 대신 섬 내부의 험준한 요새 지대로 미군을 유인하여 최대한 피해를 많이 주는 것이었다. 일본군은 결사적인 방어에 나선다. 같은 해 5월 25일까지 무려 1,500기의 카미카제(자살 특공기)가 동원된 7번의 대규모 특공 작전을 전개했다. 하지만 일본의 조직적인 저항은 6월 21일 끝났다.
미군을 이끈 사이먼 B 버크너 Jr 장군은 안타깝게도 일본이 항복하기 3일 전인 6월 18일 전선을 시찰하다 포에 맞아 숨졌다. 그는 남북전쟁 당시 남군의 장군을 지냈던 사이먼 B.버크너의 아들로 태어났다. 한편 일본군 사령관 우시지마 중장과 참모장 조 이사무 중장은 그의 군대가 항복하자 전례에 따라 할복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전투결과 엄청난 희생자가 발생했다. 오키나와 전투에서 전사한 일본군은 7만7,166명이었고 전쟁에 휘말려 희생된 오키나와 주민은 14만9,193명이었다. 전체 주민 3분의 1 이상이 사망한 것이다. 미군 1만4,009명, 영국군 82명이 전사했다. 우리 조선인 희생자도 남한 출신 365명, 북한 출신 82명으로 많았다.
오키나와 점령 작전이 완료되면서 이제 다음 차례는 일본 본토 공격이었다. 일본은 히로시마 원폭 투하 9일 후인 8월 15일 연합군에 항복을 선언했다.
패전 후 1972년 일본에 반환되기까지 오키나와 섬은 미군 점령지였다. 그 사이 미군기지 37개가 섬에 건설됐다. 오키나와는 일본 전체 면적의 1%도 안되지만 미군기지 약 80%가 주둔하고 있다. 오키나와 주민들의 반발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이유다. 오키나와 면적은 제주도의 3분의 2 정도다. 오키나와 주민들의 비극의 역사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출처=히스토리닷컴]
/김진희인턴기자 jh6945@sedaily.com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