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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 해임, 그 뒷 얘기





1951년 4월 11일 오후 3시, 일본 도쿄. 미 극동군 사령부가 충격에 빠졌다. ‘맥아더 사령관 해임’이 전격 발표됐기 때문이다. 물론 낌새는 채고 있었다. 일부 참모들은 뭔가 중대발표가 임박했다는 얘기를 듣고 있었으나 미국 워싱턴 시각으로 새벽에 발표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었다. 새벽 1시 뉴스 앞부분은 통상적인 내용이었다.

‘잘못 짚었구나’라는 생각도 찰나, 뉴스 말미에 ‘중대 발표가 있으니 기다려 주십시요’라는 아나운서 멘트가 흘러나왔다. 맥아더 원수를 UN(국제연합)군 사령관과 미 극동군 사령관 등 모든 사령관직에서 해임한다는 내용. 해임 사실을 전해 들은 된 맥아더는 부인을 껴안으며 말했다고 전해진다. ‘지니, 드디어 집에 돌아가게 됐군’ *

맥아더 해임은 말 그대로 파격이었다. 맥아더가 누구인가. 태평양전쟁의 영웅이며 ‘외국인 쇼군’(將軍·17세기 이후 개항까지 일본의 최고 통치자)이라 불리며 일본의 전후 처리는 물론 민주화를 진두지휘한 군정의 최고 책임자로 존경받은 군인이자 일본 통치자. 미군 최초의 5성 장군 아니던가.

‘강을 건널 때는 말을 바꾸지 않는다’는 전통이 유달리 강한 미국의 대통령이 한국전쟁의 와중에서 왜 장수를 내쳤을까. 공식 이유는 명령 불복종. 백악관은 맥아더 원수가 대통령은 물론 미 합동참모본부와 의견 조율도 없이 멋대로 발언하고 작전을 펼쳐 미군과 UN군에 막대한 손실을 끼쳤다는 판단을 갖고 있었다.

중공군이 참전할 것이라는 수많은 징후를 묵살해 전황이 나빠지고 장전호 철수를 비롯한 치욕적인 후퇴를 당한 마당에 맥아더 장군이 자신의 실수를 감추기 위해 중국에 대한 핵 공격 등 강경발언을 일삼고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트루먼 대통령은 군에 대한 민간 우위의 원칙마저 무너졌다고 여겼다.

트루먼과 맥아더는 이전에도 숱한 의견 충돌을 빚었다. 당시 상황에서 견해가 가장 엇갈렸던 대목은 38선 재돌파 문제였다. 1950년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시작된 전쟁 초기 부산 일대만 남기고 밀렸으나 인천상륙작전 등을 통해 북한을 거의 점령한 상태에서 중공군의 개입으로 서울까지 내줬다가(1.4 후퇴) 반격에 성공해 서울을 찾은 상황. 맥아더는 북진을 요구했으나 트루먼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훗날 비밀 해제로 공개된 미 국무부 문서 등에 따르면 트루먼 대통령과 미 행정부의 관심사는 한반도 통일이 아니라 휴전에 있었다. 더 밀고 나가면 소련과 3차 세계대전으로 번지고 핵 전쟁이 될 수도 있다는 걱정에 빠졌었다. 주요 동맹국인 영국과 프랑스의 판단도 마찬가지. 소련과 중국 역시 전쟁 이전 상황으로의 복귀를 바랐다.**

결정적으로 비밀리에 움직이던 NSA(미국 국가안전국)***의 정보가 트루먼 대통령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일본에 주재하는 외국 대사들에게 맥아더 원수가 ‘한국전을 대전으로 발전시켜 중공 문제를 원천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 원자폭탄 30개도 투하할 수 있으니 나중에 놀라지 말라’고 말했다는 NSA의 도청 보고에 트루먼은 책상을 내리치며 말했다. ‘이건 명백한 반역(Treachery)이야!’

트루먼은 갑갑해졌다. 맥아더를 내치고 싶었지만 비밀기관인 NSA가 맥아더 원수와 외국 대사들을 상대로 도청했다는 사실을 근거로 제시할 수 없었던 탓. 고민하던 트루먼에게 맥아더 스스로 구실을 안겨줬다. 맥아더의 일방적이고 독자적인 휴전 제의(3월 23일)에 백악관은 경악하면서도 속으로 웃었다. 말이 휴전제의였지 실제로는 항복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대규모 폭격에 나선다는 위협이었다. 맥아더 원수의 강경 발언은 결국 트루먼에게 꼬투리를 잡혔다. ****

맥아더 해임은 역풍을 불렀다. 맥아더 원수가 귀향하는 길에는 수십만의 인파가 몰려 영웅의 귀환을 축하하며 트루먼에게 저주를 보냈다. 트루먼의 지지도는 역대 미국 대통령 중 최하위권인 20%대로 떨어졌다. 지지도는 바로 회복됐으나 두 사람은 공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설전을 펼쳤다. 맥아더가 명령을 불복종했다는 트루먼의 자서전(1961)이 나오자 맥아더는 당시 트루먼의 참모 중에 공산주의자들이 포진해 정보를 빼돌린다는 점을 강조한 뒤 바로 보복 당했다는 주장을 펼쳤다. *****



역사에서 둘은 어떻게 기억될까. 비슷하다. 둘 다 위인으로 각인돼 있다. 미국의 역대 대통령 가운데 트루먼은 5위권을 오르내린다. 오바마까지 44명의 역대 미국 대통령 중에서 워싱턴과 링컨, 루스벨트가 항상 3자리를 차지하고 나머지 2자리에 끼어야 5위권에 든다는 점에서 대단한 평가를 받고 있는 셈이다. 3차 세계대전을 막았다는 점이 가장 크게 평가받는다. 맥아더 장군 역시 한때 6성 장군으로 추서(追敍)하자는 논의가 일었을 만큼 추앙받고 있다. 치열하게 다퉜음에도 동시에 존경받을 수 있는 미국 사회의 풍토가 부럽다.

맥아더의 해임 배경에 금융 자본의 입김이 개입했다는 분석도 있다. 론 처노가 지은 ‘금융제국 J.P. 모건’에 따르면 모건하우스 회장이던 러셀 레핑웰이 트루먼 대통령에게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것이다. ‘모건가의 무드셀라(방주를 만든 노아의 할아버지로 성서에서 가장 장수한 사람으로 나온다. 969세. 모건하우스에서 그만큼 오래 군림했다는 뜻)’로 불렸던 레핑웰이 친구인 트루먼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의 한 대목. ‘비참한 4억 중국인을 상대로 전쟁을 벌여서는 안 된다. 중국인은 군벌과 정부, 일본의 점령 때문에 고생했다…(중략)…우리는 중국인을 죽여야 할 사명을 갖고 있지 않다. 중국과 전쟁을 한다면 미국과 유럽에서 무방비에 빠질 것이다.’

국제관계위원장직도 맡고 있던 레핑웰의 편지 발송일은 1950년 11월 말. 맥아더가 ‘중공의 개입 가능성은 전혀 없다’며 호언장담하던 무렵이다. 얼마 후 중공군이 국경을 넘고 미 해병대가 장전호 전투에서 대패하자 트루먼은 맥아더의 상황판단 능력을 의심하기에 이른다. 반대로 모건그룹에 대한 신뢰는 깊어졌다. 레핑웰은 확전시 이익 감소를 우려해 이런 서신을 보낸 것으로 알려졌지만 해임이라는 결과는 편지의 취지와 똑같다.

과연 모건금융그룹은 맥아더 해임에 얼마나 영향을 미쳤을까. 별도의 연구가 필요한 대목이다. 보다 관심이 가는 점은 따로 있다. 6.25 전쟁이 한창이던 시절부터 미국에서는 정치권과 월가, 군수산업간 다중 채널의 의사전달 통로가 수시로 가동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동맹국은 뒷전이다. 예나 지금이나. ****** 권홍우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 맥아더 장군의 해임 통지는 당초 4월 11일 저녁 8시( 한국 시각 12일 오전 10시) 한국 전선을 시찰 중이던 미 육군 장관 프랭크 페이스를 통해 전달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시카고 트리뷴지의 백악관 출입기자가 이를 눈치채자 당황한 백악관은 시간을 앞당겨 4월 11일 새벽 1시(한국 시각 11일 오후 3시) 맥아더 장군 해임을 전격 발표했다.

** 미국과 직접 대화할 창구가 없던 중공은 중립국 인도를 통해 자신들의 입장을 전했다. 국군과 미국군이 처음으로 38선을 넘던 1950년과, UN군이 재반격하려던 1951년 봄에 중공은 미군의 38선 돌파를 좌시할 수 없다는 입장을 전하며 한 가지 단서를 달았다. ‘한국군 단독으로 38선을 넘는다면 상관하지 않겠다’는. 한국군을 그만큼 얕잡아 봤다는 얘기다. 휴전을 앞두고 지리하게 펼쳐진 고지전투에서 당시 국군은 몇 배가 넘는 중공군은 수없이 물리쳤으나 현리 전투 등에서 군단 병력이 소규모 중공군에게 무너지는 대참패도 몇 차례 기록했었다.

*** 1947년 창설된 NSA는 CIA(중앙정보국)의 전신. 한국전쟁 동안 공식적으로는 거의 언급된 일이 없는 극비기관이었다. 암호기기와 감청 수단을 통해 미국 정부의 통신 체제를 방어하고 적국이든 우방이든 가리지 않고 다른 나라들의 메시지와 국내 주요 인사의 대화와 전화를 도청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NSA가 트루먼에게 보고한 비밀 정보에는 맥아더가 외국 대사들에게 대만으로 쫓겨난 자유중국군을 중국 본토에 진공시킨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 맥아더 원수가 중공을 자극하려 실질 군사행동에 들어갔었다는 기록도 근년에 나왔다. 에드워드 마롤다 박사의 ‘미 제7함대 역사’(2012 미 해군성 발간)에 따르면 맥아더 원수는 4월 7일 동해에 있던 7함대 소속 77기동대의 함정 두 척을 대만 해협 중공측 해안 근처로 파견하며 무력시위를 지시했다. 4월 11일 대만해협에서 미 해군 구축함과 대치하는 중공의 무장선 47척 중에서 총이라도 한 발 쏘면 즉각 확전으로 치달을 비상 상태에서 전격 해임이 결정됐다는 것이다.

***** 당시는 매카시 상원의원이 주도한 ‘빨갱이를 잡아들이자’는 매카시 선풍이 한창일 때여서 맥아더가 ‘백악관 내 첩자’바로 말했다면 파장이 컸을지도 모른다. 2차 대전이 끝난 뒤 세계 경제를 어떻게 운용하느냐를 놓고 1944년 연합국들이 모였던 브래튼우즈 협상에서 영국 대표 케인즈를 누르고 미국의 방안(IMF·IBRD 창립)을 채택시킨 미국 재무성 대표 헤리 화이트조차 매카시즘의 희생양이 되던 시절, 퇴역한 맥아더는 군에 매카시즘이 확산되는 현상을 우려했다고 한다. 웨스트포인트 사상 최고 점수로 수석 졸업, 미 육군 최연소 사단장, 최연소 참모총장 등의 기록을 갖고 있는 맥아더는 자존심이 강하고 남다른 우월감으로 독불장군이라는 지적을 많아 받았다. 반면 라틴어 고서를 줄줄 암송하는 실력을 가졌지만 20세기 미국 대통령 중에서는 유일한 고졸 출신인 트루먼은 참모들과 항상 상의해서 일을 처리했다. 둘은 여러 가지 점에서 대조적이다.

****** 러핑웰은 친일성향이 강하기로도 유명했다. 한때는 미국의 중앙은행 역할까지 맡았던 모건하우스 자체의 친일성향이 강하다. 몇 가지 이유가 있다. 눈여겨 볼 대목은 미국과 일본이 평화협정을 체결한 1951년 일본 재무성의 고위관리가 모건 하우스를 찾아와 놀라게 만들었다는 점. “과거에 우리 정부가 서명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왔다”고 밝힌 일본 공무원들은 1920년의 원리금 일체를 갚았다. 이미 손실 처리가 다 끝난 채무를 요구하지 않았는데도 상환한 일본과 모건하우스와 관계가 더욱 깊어졌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한국 입장에서 때로 “미국은 한국을 일본 아래의 동맹으로 여기느냐”고 불만을 표시하지만 미국과 일본의 관계에는 전략적 중요도에 앞서 이런 사례들이 수없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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