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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명보다 석탄', 日 번시탄광 참사





1942년 4월 26일 오후 2시 5분, 만주국 랴오닝성(遼寧省) 번시(本溪) 탄광. 굉음과 함께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앞을 분간할 수 없는 검은 연기에 휩싸인 탄광에서 광부 1,549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전까지 최악의 참사로 기록된 프랑스 코리에르 탄광 폭발(1903년)로 인한 사망자 1,099명보다 훨씬 많았다. 번시(일본명 혼케이코)탄광 참사는 인류가 경험한 최악의 광산 사고로 남아 있다.

사상 최악의 탄광 사고임에도 번시 폭발사고는 사료가 많지 않다. 재난에 관한 기록을 철저하게 남기는 미국과 유럽의 언어는 물론 중국어와 일본어 자료도 찾아보기 힘들다. 일본 제국주의의 고의적 은폐와 역대 중국 정부가 사후 조사를 게을리 한 탓이다. 사고 60년이 지난 후부터야 생존자들의 목소리가 조각난 퍼즐처럼 맞춰지는 정도다.

랴오닝성 지방은 예로부터 양질의 철광으로 유명했던 지역. 고구려 시조 주몽이 부여를 탈출해 나라를 세우며 첫 수도로 졸본성(오녀산성)을 고른 이유도 풍부한 철광석 때문으로 알려진 이 지역은 석탄도 많았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하며 목에 힘주고 만주로 진입한 일본은 오쿠라(大倉) 재벌을 앞세워 번시 광산 채굴에 들어갔다.

겉으로만 중일 합작이었을 뿐 일본이 단독으로 경영권을 행사한 탄광의 노동환경은 열악했지만 1931년 만주침략 이후에 비하면 그나마 나은 편이었다. 일본의 괴뢰 만주국이 건국(1932년)된 뒤부터 작업 환경은 더욱 나빠졌다. 만주를 계획경제체제로 운영하며 군수공업 중심의 거대한 중화학공업단지를 조성하려던 일제는 산업화의 연료로 석탄 증산에 매달리며 갖은 방법으로 일꾼을 끌고 왔다.

더욱이 일본 본토에는 이렇다 할 철광산이 없었던 마당. 만주와 중국은 물론 인도차이나와 태평양전쟁까지 일으킨 일본은 철과 석탄이 풍부한 번시 광산을 마구잡이로 파먹었다. 당연히 인력 소요도 커졌다. 일반 모집으로도 광부가 부족하자 일제는 강제 징용과 항일운동을 벌이다 체포된 중국인들을 탄광에 집어넣고 하루 12시간 이상 노예로 부렸다. 중국 자료에는 연인원 850만명이 이곳에서 강제노역했다는 추정도 있다.

사고 경위와 처리는 더욱 악랄하다. 무엇보다 대형 사고를 방지할 시간적 여유가 충분했다. 이상 징후가 처음 발생한 시각은 오전 11시 30분. 부슬비가 내리는 가운데 지상 변압기가 고장으로 작동을 멈췄다. 광산 전체에는 전기 공급이 끊겼다. 광부들을 이때 철수시켰다면 대형 인명 피해를 막을 수 있었지만 증산에 눈 먼 일제는 그러지 않았다. 전압기가 복구된 시각이 오후 2시 무렵. 환풍기가 먼저 돌아갔다.

지하 갱도에도 전기가 공급되고 바로 뒤, 폭발이 일어나고 광산 지역 전체에 검은 연기가 가득 찼다. 후일 사고 조사에서 폭발의 원인은 정전으로 환풍기가 멈추며 갱내에 빠져 나가지 못한 석탄 분진(미세한 기루)으로 지목됐으나 정작 인명 피해를 키운 요인은 따로 있다.



두 가지였다. ‘정풍(停風)과 봉정(封井).’ 사고 직후 일제는 바람이 통하면 광산 시설이 연쇄 폭발할 수 있다며 돌아가는 환풍기를 껐다. 공기 흐름을 차단한다며 주요 갱도 입구까지 막았다. 폭발이 일어난 갱내에서 광부들은 탈출의 방법이 없었다. 사망자의 대부분은 갱도 입구에서 일산화질소에 질식돼 죽었다.

참상이 해외에 알려졌을 때는 이런 반응이 나왔다고 한다. ‘인명보다 석탄이 더 소중한가(need coal, need not people)!’ 소중한 생명도 있었다. 오후 3시 30분 무렵 조직된 일본인 구조대가 사투 끝에 구조해낸 사람도 있었으니까. 폭발 사고에서 유일한 구조자는 일본인 작업 감독이었다. 하루 뒤부터 시작된 사체 수습은 열흘 넘게 걸렸다.

일본은 여론을 호도하기 위해 사고 한 달 뒤 세운 희생자 위령비에서도 장난을 쳤다. ‘혼케이코 산업전사 위령비’에서 사망자를 1,327명을 줄였다. 확실하게 나온 사망자 수를 이 정도로 줄인 것은 그나마 약과. 사고 후 현지에서 발행된 일본계 신문들은 단지 40자(字)로 구성된 기사를 실었을 뿐이다. ‘혼케이코 탄광에서 폭발 사고가 일어났으나 피해는 경미하다.’ 패해가 경미하다고 자기 최면을 걸었기 때문일까. 대형 사고에도 책임 규명은커녕 부장급 한 사람의 정직과 감봉에 그쳤다.

일제가 감췄던 사고의 진상은 1950년대 중반 이후 생존자들의 진술을 통해 하나씩 밝혀졌어도 아직도 베일 속에 있다. 사고 몇 개월 후 벌어진 조사에서 발견된 갱도 옆에 수많은 사체들은 아예 사망자에 포함되지도 않았다는 주장도 있다. 중일전쟁에서 승리한 직후 국민당군이나 대륙을 석권한 공산정권이 책임 규명을 게을리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세계최대의 석탄 생산·소비국으로 해마다 수천명씩 광산 사고가 그치지 않는 중국의 입장에서 침략자의 잘못이라도 광산 사고를 거론하기가 편치 않다는 분석도 있지만 역사의 상처는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사고의 생존자인 중국 노인이 남긴 글이 뇌리에 남는다. ‘일본침략자들이 반성하지 않고 더러는 미화하지만, 중국인들은 영원히 잊지 않고 기억할 것이다(中國人民永遠不會忘記)!’

고인들의 명복을 기리는 마음 속에서 궁금함이 고개를 든다. 공식적으로 알려진 사망자 1,549명 가운데 일본인은 31명. 마침 일요일이어서 대부분 휴일을 가졌기에 일본인의 피해가 적었다는데… 사망자 중에서 조선인은 없었을까. 있었다면 항일독립운동을 벌이다 중국인 신분으로 잡혀 와 희생 당했을까. 아니면 ‘2등 일본 신민’이라는 자부심으로 중국인 착취에 앞장서던 인물이었을까. 하긴 창씨개명을 거듭해 민족의 흔적을 지웠다면 조선인인지 일본인인지 가려낼 수도 없었겠지만./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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