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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야, '5월3일의 학살'





마드리드 시민들이 들고 일어났다. 발단은 외국인 국왕 임명. 인기는 없었어도 멀쩡한 왕을 폐위하고 나폴레옹의 형인 조세프 보나파르트가 스페인 국왕으로 부임한다는 소식에 마드리드가 들끓었다. 마침 인권 신장과 대혁명의 사도라고 믿었던 프랑스군의 압제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던 터. 불만은 곧 봉기로 이어졌다. 항거하는 스페인 민중을 프랑스군은 총칼로 짓밟았다.

스페인 낭만주의 화풍의 대가 프란시스코 고야는 6년 뒤 이를 화폭에 옮기고 이런 제목을 붙였다. ‘1808년 5월 2일’. 고야가 붙인 이름 대신 ‘마드리드의 봉기’ 또는 ‘5월 2일의 봉기’로 불리는 스페인 시민들의 봉기는 피를 불렀다. 동료들이 죽어 나가자(31~150명) 프랑스군은 더욱 무자비한 탄압에 나섰다. 시민 500여명이 죽임을 당한 가운데 공개 처형 당한 사람만 113명. 고야는 이 역시 화폭에 담았다. 제목 ‘1808년 5월 3일.’

‘5월 3일, 쁘린씨뻬 피오 언덕의 총살’로도 불리는 이 작품은 당시 상황을 적나라하게 전해준다. 두 팔을 벌리고 총살형을 맞이하는 흰색 상의를 입은 남자의 손바닥에 못 자국이 보인다. 죄 없이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보는 듯하다. 반대편 사형 집행자들은 양심의 가책 탓인지 고개도 들지 못한 채 총검을 들이대고 있다. 고야가 그린 학살 장면은 20세기 미술계의 거장 파블로 피카소의 ‘한국에서의 학살’에도 영향을 미쳤다.

고야의 그림은 경제사의 한 단면이기도 하다. 프랑스군이 스페인에 진주한 배경은 대륙 봉쇄령. 나폴레옹이 영국 경제의 숨통을 죄기 위해 단행한 경제적 봉쇄조치는 거꾸로 영국의 이익을 불려준 반면 유럽 대륙의 물자 부족을 야기했다. 수요는 공급을 낳게 마련. 스웨덴과 스페인, 포루투갈 등지에서 밀수가 뒤따랐다. 분노한 나폴레옹은 밀수의 중심지이던 포르투갈과 스페인에 군대를 보내고 결국 학살극까지 벌어졌다.

스페인의 저항은 나폴레옹 몰락의 서곡이었다. 실은 프랑스군대가 마드리드에 진입하던 무렵이 영광의 최절정기. 나폴레옹 용병술의 백미라는 아우스터리츠 전투(1805.12)의 성과를 담아낸 결과물인 틸지트조약(1807.7)을 통해 러시아까지 머리를 조아리고 들어왔기 때문일까. 기고만장한 나폴레옹은 영국과 밀무역을 하는 포르투갈을 응징하겠다며 스페인에 진주하더니 마침내 자기 형을 국왕으로 앉혔다.

프랑스군은 전국적으로 확산된 민중 봉기에 밀렸다. 조세프가 마드리드에서 쫓겨나자 나폴레옹은 직접 20만 대병력을 지휘해 스페인을 되찾았다. 오스트리아의 저항 움직임에 나폴레옹은 걱정하는 형 조세프에게 ‘오스트리아를 혼내주고 늦어도 한 달 반이면 돌아올 것’이라며 전장으로 떠났으나 결코 돌아오지 않았다. 1809년 7월 바그람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을 크게 무찔렀는데 왜 돌아오지 않았을까. ‘혈통’에 대한 미련 탓이다.

오스트리아 비엔나에 진주한 나폴레옹은 1810년 합스부르크가문의 대공녀 마리 루이즈와 결혼해 이듬해 아들을 얻었다. 나이 40세였던 나폴레옹은 띠동갑인 18세 신부와 파리에 머물며 스페인에 나타나지 않았다. 나폴레옹이 없는 동안 스페인의 상황은 프랑스군 입장에서는 한 마디로 수렁. 온 국민이 뭉쳐서 끈질기게 저항하는 통에 스페인은 프랑스군의 무덤으로 변해갔다.* 나폴레옹 전쟁 초기 청년장교였던 칼 폰 클라우체비츠는 ‘전쟁론’에서 ‘무장한 인민의 침략군에 대한 저항, 즉 인민전쟁의 시초가 스페인 민중의 저항’이라고 봤다.

하긴 나폴레옹이 정신 차리고 전쟁터에 나왔어도 상황이 달라질 여지는 크지 않았다. 무려 35만명이라는 프랑스군이 발목이 묶인 상태였으니까. 지형 자체가 평원에서 기동전과 병과 간 협동작전에 의한 섬멸전을 주특기로 삼는 프랑스군이 가장 싫어하는 산악 지역이 대부분이었다. 포병과 기병대 운용이 제약받는 상황에서 게릴라(guerrilla)로 변한 시민과 성직자, 농민들의 기습을 받아 전력이 약해졌다.**



결국 스페인군과 포르투갈·영국의 연합군은 1814년까지 계속된 ‘반도전쟁’에서 소부대 기습전략으로 나폴레옹의 35만 대군을 무찔렀다.*** 약 4만명의 영국군을 지휘하며 ‘반도전쟁’을 승리로 이끈 영국군 웨즐리 육군 소장은 승전을 거듭하며 공작 작위까지 따냈다. 엘바섬을 탈출해 100일 천하를 누린 나폴레옹의 마지막 싸움인 워털루 전투에서 승리를 따낸 웰링턴 공작이 바로 아일랜드 출신의 빈한한 귀족이었던 아서 웨즐리 장군이다.

세인트 헬레나섬에서 나폴레옹은 “스페인의 궤양이 나를 괴롭혔다”고 한탄했다지만 중요한 전장을 마다하고 ‘후대에게 프랑스 제국 황제의 적통에 걸맞는 혈통을 찾아준다며 결혼 놀음에 빠져 있던 본인을 책망할 수 밖에. 프랑스군은 러시아 원정에 앞서 이미 스페인에서 진이 빠지고 골병들었던 셈이다. 스페인 민중들은 끊임없이 프랑스군을 괴롭혔다. 프랑스군은 질서와 치안 유지, 주둔지 방어, 병참선 안전 확보에 병력을 투입하느라 지쳐갔다.

스페인에 주둔했던 프랑스군이 언제나 영국과 스페인, 포르투갈의 정규군보다 많았으면서도 항상 적은 병력으로 싸울 수 밖에 없었던 이유도 게릴라들로 인해 분산을 강요받았기 때문이다. 포르투갈에서도 적군인 프랑스군과 싸우며 근대적 시민의식이 보다 뚜렷해졌다. 더욱이 개전 초기 본토를 버리고 식민지인 브라질로 이주한 왕실에 대한 불신도 깊어졌다. 브라질 역시 비슷한 시대적 배경을 공유한다. 나폴레옹에 쫓겨 브라질 식민지로 피신했던 포르투갈 왕실이 본국으로 귀국할 때 홀로 남았던 왕세자는 1822년 ‘독립이냐 죽음이냐’를 외치며 독립을 선포한 게 독립 국가로서 브라질의 첫 아침이다.

만약 나폴레옹이 혁명의 전파자에 만족하며 피붙이들을 유럽 각국의 꼭두각시 왕으로 옹립하지 않았다면, 자기 자식에게 물려줄 고귀한 혈통에 매달리지 않았다면 역사는 달라졌을까. 역사가 반복해서 들려주는 무수한 교훈에도 사람들은 오직 나와 내 가문의 피만이 가장 확실한 보전수단이라고 믿는다. 되먹지 못한 재벌 3세, 4세들과 나폴레옹가의 몰락이 머리 속을 오간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한창 많을 때는 35만명선에 달했던 스페인·포르투갈 주둔 프랑스군은 연인원 27만~30만명이 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20만명은 프랑스인, 나머지는 동맹국 군대의 전사자라고.

** ‘스페인어로 ‘작은 전쟁’을 의미하는 ‘게릴라(Guerrilla)’라는 용어가 바로 이때(1809년)부터 쓰였다.

*** 이 전쟁에 대한 명칭부터 나라마다 다르다. 스페인은 ‘독립전쟁’이라 부르고 영국에서는 ‘(이베리아) 반도전쟁’이라고 쓰며 프랑스는 ‘에스빠냐 전쟁’이라고 한다. 전쟁의 성격에 대해서도 각국의 입장이 조금씩 차이난다. 스페인은 애국시민들의 게릴라 활동을 부각하는 반면 영국은 웨즐리 장군의 영국군이 주류였고 게릴라는 오히려 작전에 반대가 됐던 ‘오합지졸’로 격하하는 경향이 짙다. 프랑스는 ‘게릴라’의 전력을 과대평가하는 한편으로 게릴라의 비인도적이고 잔인한 측면을 강조하는 데 무게를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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