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코와 미국 남부지역은 이맘때면 축제 분위기에 젖는다. 화려한 멕시코 민속 의상을 차려 입은 대열이 시가를 누비고 온갖 산해진미가 관광객을 부른다. 축제의 이름은 ‘싱코 데 마요(Cinco De Mayo)’. 100만명의 관광객이 몰린다는 싱코 데 마요는 스페인어로 ‘5월 5일’인데 무엇을 기념하는 축제일까. 어린이날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
멕시코인들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싱코 데 마요의 기원은 1862년 5월5일. 멕시코 중남부 푸에블라에서 프랑스 침략군과 전투가 발생했던 날이다. 멕시코군은 병력과 장비의 열세에도 프랑스군을 무찔렀다. 정규군 6,040명에 신형 대포 12문을 갖춘 프랑스군이 구식무기로 무장한 4,500여 멕시코군과 맞붙은 결과는 참패. 실전 경험이 많은 멕시코군을 얕잡아본 지휘관의 자만 탓에 462명이 죽고 300명 부상에 8명이 포로로 잡혔다. 멕시코의 피해는 83명 전사, 141명 부상.
멕시코인들은 승리의 감격에 몸을 떨었다. 스페인의 황금 사냥꾼 에르난 코르테스가 아스텍 제국을 무너뜨린 1521년 이래 가혹한 수탈에 시달린지 300여년. 독립전쟁으로 겨우 나라를 세웠으나 1848년 미국에 영토의 절반을 빼앗긴 오욕의 역사 뒤에 찾아온 한 줄기 빛이었기 때문이다. 교회와 군부, 지주 계급이 기득권을 유지하려 이합집산하며 분열된 나라에서 세계를 호령하던 프랑스군과 서전에서 대승했으니 기쁨이 컸다.
프랑스가 멕시코를 침공했던 명분은 돈. 채무를 갚으라는 구상권 행사가 빌미였다. 독립전쟁 직후 수립된 멕시코 제1제정이 부패로 무너지고 내전 끝에 들어선 민중 기반의 공화정은 경제난에 시달렸다. 산타 아나의 독재정권을 물리치고 집권한 베니토 후아레스 정권이 추진한 각종 민주개혁은 경제권을 움켜쥔 교회와 군부, 지주 계급의 반발과 저항에 부딪혔다. 당시 멕시코 인구 900만명 가운데 순수 인디오 500만명과 원주민과 유럽 혼혈인 메스티소 300만명은 정부를 지지했어도 토지와 상권을 장악한 상류층 백인 100만명은 세금조차 내지 않았다. 경제난이 깊어지자 멕시코는 1861년 채무불이행과 원금 및 이자의 2년간 지급정지를 선언할 수 밖에 없었다.
모라토리엄 선언 반년 뒤 채무국들은 군대를 보냈다. 멕시코 동부의 최대 항구도시인 베라크루즈항에 스페인군 6,000명을 시작으로 영국군 800명, 알제리 보병 600명을 포함한 프랑스군 2,600명이 차례로 상륙해 멕시코에 채무를 상환하라고 윽박질렀다. 외국 군대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 풍토병에 시달리던 외국 군대가 멕시코 정부와 협상해 군대를 철수하는 데도 프랑스는 오히려 파병 규모를 7,000명으로 늘렸다.
프랑스의 통치자 나폴레옹 3세는 돈보다 새로운 영토에 관심이 있었다. 멕시코가 계산한 프랑스의 채권은 300만 페소. 프랑스는 멕시코의 실질 채무액이 1,500만 페소라고 우겼지만 영국의 채권 6,900만 페소보다는 훨씬 적었는데도 채무를 빌미로 멕시코에 새로운 제국을 건설하려 들었다. 러시아와 크림반도를 놓고 싸우고, 이탈리아 통일전쟁에 개입하며 알제리와 서부 아프리카, 중국 남부와 베트남까지 침략했던 야심가 나폴레옹 3세는 정복을 원했다.
결국 푸에블라의 서전 승리 기쁨도 잠시. 멕시코는 3만8,000명으로 불어난 프랑스군에 점령당하고 말았다. 1864년에는 나폴레옹의 혈통이라는 소문이 자자했던 합스부르크가의 요제프 대공을 막시밀리아노 1세로 추대했다. 멕시코 제2제정이 탄생한 것이다. ** 막시밀리아노 1세는 인디오 농민의 친구를 자처하며 나름대로 개혁정치를 펼쳤지만 상황 변화가 일어났다. 프랑스군은 1867년 완전 철수하고 황제 자신도 총살형 당하며 인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
멕시코에 새로운 제국을 세우겠다며 기세등등하던 나폴레옹 3세의 야욕이 꺾인 이유는 두 가지. 먼저 남북전쟁을 마친 미국이 꺼렸다. 유럽의 호전적 강대국인 프랑스 제국의 지배를 받는 멕시코가 달갑지 않았다. 남북전쟁 와중에도 프랑스에 철군을 요구한 미국은 종전 후에는 직접적인 군사개입 가능성까지 흘리며 프랑스를 압박했다. 결정적으로 국력이 뻗어나던 프로이센과 전쟁이 코앞에 다가왔다. 결국 멕시코 주둔 프랑스군은 본토를 지키려 전원 돌아갔다. ****
프랑스군이 패퇴한 진짜 요인은 따로 있다. 5년간 30만~50만명이 희생될 만큼 끈질겼던 멕시코 민중의 저항 때문이다. 흥겨운 싱코 데 마요 축제에는 조국을 구해냈다는 긍지가 깔려 있다. 남의 것을 빼앗겠다는 권력자의 욕심은 유한할 뿐 아니라 몰락을 재촉해도 나의 것을 지키겠다는 민초들의 의지는 역사 속에서 영원히 빛난다. 멕시코 민중에게 찬사를!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 어린이날(Children‘s Day)의 제정과 유래, 휴일 여부는 나라마다 다르다. 국제 어린이의 날은 6월1일. 1925년 제네바에서 열린 아동 복지를 위한 세계 회의가 만들었다. 대부분의 공산주의 국가가 이날을 어린이날로 기념하는 통에 국제 어린이날은 동구권에서 제정한 것으로 오해를 받기도 하지만 사실과 다르다. 유엔과 유네스코가 1954년에 정한 세계 어린이날은 11월20일.
5월5일을 어린이날로 지정한 국가는 엄밀히 따져 우리나라뿐이다. 1922년부터 소년운동단체와 언론사 등이 5월 1일을 ‘소년일’으로 기념하다 소파 방정환을 비롯한 일본 유학생들이 만든 색동회를 통해 널리 퍼졌다. 노동절과 겹친다는 지적에 따라 1927년부터 5월의 첫째 일요일로 옮겨 기념행사를 치렀다. 일제강점기 말기인 1939년부터 중단된 어린이날은 1946년 부활해 1961년 제정된 ‘아동복지법’에 의해 5월5일로 굳어졌다. 공휴일 지정은 1975년부터. 일본도 5월5일이 어린이날이지만 ‘남자 어린이의 날’이다. ‘여자 어린이의 날’은 3월 3일.
** 요제프 대공은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동생으로 자애롭고 용맹스러웠던 인물로 기억된다. 오스트리아 해군에 복무하며 솔선수범하는 제독으로 이름 높았다.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총독을 지내던 중 나폴레옹 3세의 초빙에 응해 막시밀리아노 1세라는 이름의 멕시코 황제 자리에 올랐다. 그는 프란츠 카를 대공과 바이에른 공주 출신인 조피의 둘째 아들로 1831년 출생했지만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직계 손자라는 루머가 끊임없이 따라 다녔다. 나이 40세의 나폴레옹 1세가 오스트리아로 진격한 뒤 첫째 부인 조세핀과 이혼하고 새로운 황후로 맞이한 18세의 마리아 루이즈가 낳은 아들이 나폴레옹 2세다. 막시밀라아노 1세의 아버지인 프란츠 카를 대공은 마리아 루이즈의 남동생. 누나의 아들인 나폴레옹 2세를 ‘나폴레옹’이라는 이름을 빼고 ‘라이히슈타트 공작 프란츠’라고 부른다는 조건으로 맡아 한동안 같이 살았다. 막시밀리아노 1세의 외사촌형인 나폴레옹 2세와 어머니 조피가 워낙 친하게 지내 이런 소문이 따라 붙은 것으로 보인다. 막시밀리아노 1세가 태어나자마자 나폴레옹 2세가 사망한 뒤에 조피가 우울하고 냉정한 사람으로 변했다는 점도 소문을 더욱 퍼지게 만들었다. 역사가 사이에서는 정황상 루머일 뿐이라는 해석이 우세하다.
*** 과연 막시밀리아노 1세가 20세의 나폴레옹 2세와 6세 연상 외숙모 사이의 불륜으로 잉태된 아들인지는 여전히 미스터리의 영역으로 남아 있지만 멕시코 황제로서 그는 자애롭게 통치하려 애썼다. 베니토 후아레스의 개혁 조치들도 이어받았다. 강제노역을 폐지하려 노력해 토지를 소유한 대주주집단의 반발도 샀다. 후아레스 정권이 몰수했던 막대한 교회 보유 토지도 돌려주지 않아 가톨릭 성직자 집단과도 대립각을 세웠다. 기득권층의 비협조로 국고가 바닥나자 개인 재산을 썼다. 패배가 확실해졌어도 주변의 퇴위와 망명 권유를 뿌리치고 총사령관을 맡아 끝까지 싸웠다. 막시밀리아노 1세가 항복한 뒤 유럽의 군주들과 문호 빅토르 위고, 이탈리아 통일의 영웅 주세페 가리발디가 살려달라는 청원서를 넣었으나 끝내 총살당했다. 세계 각국의 탄원에도 ‘황제’를 그대로 두면 후환이 될 것이라며 총살을 집행한 대목은 그가 민중의 신망을 잃지 않았다는 방증의 하나다.
**** 나폴레옹 3세는 결국 프로이센과 전쟁에서 패하며 몰락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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