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메뉴

검색
팝업창 닫기
이메일보내기

죽음의 낙지

[식담객 신씨의 밥상] 열 세번째 이야기- 낙지





2001년 이른 봄, 개강을 며칠 앞두고 같은 과 후배와 함께 부산에 놀러갔습니다.

이른 아침 서울역의 바람은 싸늘했는데, 점심 무렵 부산역의 바람엔 푸릇한 봄내음이 스며 있었습니다.

해운대 글로리 콘도에 짐을 풀고, 남포동거리와 자갈치시장과 국제시장을 구경했습니다.

서울 촌놈이 보는 부산 풍경은 신기하고 이채로웠습니다.

저녁 무렵엔 인근에 살던 여자 후배도 들렀습니다. 같이 간 후배가 마음에 둔 아이였는데, 여동생과 함께 왔습니다.

해운대 바닷가 횟집, 공복에 소주를 일 잔 들이키니 뜨끈한 취기가 식도에 회오리쳤습니다.

갑자기 후배를 밀어주고픈 의욕이 치솟았습니다.

있는 칭찬, 없는 칭찬 읊어대며 한 잔씩 부딪치다 보니, 어느새 지갑마저 취해버렸습니다.

회도 먹고, 괴기도 먹고, 소주도 마시고, 맥주도 마시고, 칵테일도 마시고...

이튿날 오전, 모래를 한 줌 삼킨 듯한 갈증에 잠에서 깨 무심코 머리맡의 지갑을 열어봤습니다.

‘핫핫핫!’ 돈을 물처럼 썼더니 결국 수증기처럼 증발해 버렸습니다.

아슬아슬하게 서울 올라갈 차비만 남았습니다.

아쉬운 한숨에 TV 리모컨만 만지다 보니 어느새 오후가 되었습니다.

아직 하루를 더 머무는데, 이렇게 의미 없이 시간을 보내기엔 아쉬웠습니다.

전화기를 들어 꼼꼼히 번호들을 살피고, 통화 버튼은 눌렀습니다.

“이모, 건강히 잘 지내셨어요? 저 00이에요.”

5촌 이모님이 사시는 영도로 향했습니다. 용돈을 타려는 의도가 너무 분명해 보여 조바심도 났지만, 경우를 따지기엔 피가 너무 뜨거웠습니다.

“아이구, 우리 조카 여전히 머리크기는 장군감이네. 밥 먹자. 이모가 맛있는 거 많이 했다.”

쇠고기 무국에 흰 쌀밥부터 갈비찜, 명태전, 꼬치산적, 고사리나물, 잡채, 거기에 낙지볶음까지, 내가 좋아하는 음식은 모두 모였습니다.

아침부터 먹은 게 없었던 터라, 허겁지겁 후배와 진공 청소기치럼 음식들을 빨아들입니다.

특히 매콤칼칼한 낙지가 입맛을 돋웁니다. 식사 중에 이모부께서 후배에게 물으십니다.

당시 60대 초반이셨던 이모부는 선비처럼 꼿꼿한 기품과 풍모에 성격이 엄하셔서, 가족들에게 인기가 없는 분이셨습니다.

“자네는 성이 뭔가?” (-_- )

“예, 성은 배가고 이름은 00입니다. ( -o-)

”그럼 시조가 누구신가?“ (-_- )

”예, ‘지’자, ‘타’자 쓰십니다.“ ( -0-)

”‘배, 지, 타’님이라....“ (-_- );;???

”푸흡~!“ (@_@);;

갑자기 드래곤볼의 캐릭터 ‘베지타’가 떠오르고 말았습니다.

밥상에서 점잖지 못하다고 이모부가 꾸짖으실 것 같아 억지로 참습니다.

원래 웃음이란 게 웃으면 안 되는 상황에서 더 끈질긴 법입니다.

억누른 웃음이 드래곤볼을 모았는지 이내 다시 되살아납니다.

자존심 강한 엘리트 전사가 배씨집안을 이끄는 모습이 그려지며 웃음은 멈추지 않습니다.

결국 한계를 넘어섰습니다.

”푸하핫!“

수류탄 같은 단발 웃음이 터집니다.

입안에 씹고 있던 음식들도 파편처럼 퍼집니다.

”꺽꺽~“



사래가 들려 물을 마셨지만, 좀처럼 진정이 되지 않습니다.

”형, 화장실 다녀와요.“

눈짓 섞인 후배의 말에 급하게 화장실로 향합니다.

거울을 보니 콧구멍 언저리에 뭔가 걸려있습니다.

씹고 있던 낙지다리가 콧구멍을 통해 밖으로 나온 겁니다.

혀에서 매콤칼칼 맛깔스럽던 낙지는 코 안을 불지옥으로 만들었습니다.



여러 차례 코 안을 물로 헹궈내 겨우 진정이 될 무렵, 떠오른 모습은 이모부였습니다.

내가 야단맞는 것보다, 남겨두고 온 후배가 걱정이었습니다.

조심스레 다시 밥상 앞으로 옵니다.

”죄송합니다.“

”괜찮나? 조심해야지.“

어, 이모부가 이런 분이 아닌데?

이모부가 말을 이어나가십니다.

”그래, 배지타님이라... 드래곤 볼 나온 다음부터 친구들이 많이 놀렸겠군?“ (-_-);;

헉... 이모부가 새롭게 보입니다.

환갑을 넘은 연세에 드래곤 볼과 베지타를 아시는 이모부님이 새삼 친근하게 느껴졌습니다.

”난 주인공 손오공보다 베지타가 더 끌리더라. 남자는 집념과 끈기 아이가? 주인공이 아니라도, 이기지 못해도, 또 도전하고 달려가는 게 사나이다!“

밥상 맞은편에서 이야기를 듣는 후배와 나의 눈에 감동이 어립니다.

”내일 올라간다고? 부산까지 왔는데 재밌게 놀다가라.“

건네신 봉투가 제법 두툼합니다.

뭔가 멋쩍고 죄송하고 훈훈한, 복잡 미묘한 마음이 가슴 속을 헤맵니다.

그렇게 나의 첫 부산여행이 재밌고 맛있게 저물어 갔습니다.

벌써 15년이 지났습니다.

서늘한 바람이 불면 부산에 다녀와야겠습니다.

*배씨의 시조

배씨(裵氏)의 도시조(都始祖)는 지타, 신라의 전신인 사로(斯盧)의 6촌 중에 금산가촌(金山加利村)의 촌장이다.

다른 5부 촌장들과 함께 박혁거세(朴赫居世)를 신라 초대 왕으로 추대한 공으로, 개국공신이 되었으며 총재태사에 올랐다.

32년(유리왕 9)에 금산가리촌이 한지부(漢祗部)로 개칭되었고, 배씨를 사성(賜姓)받게 되면서 배씨의 시원이 되었다. /식담객 analogoldman@naver.com

식담객 신씨는?

학창시절 개그맨과 작가를 준비하다가 우연치 않게 언론 홍보에 입문, 발칙한 상상과 대담한 도전으로 주목을 끌고 있다. 어원 풀이와 스토리텔링을 통한 기업 알리기에 능통한 15년차 기업홍보 전문가. 한겨레신문에서 직장인 컬럼을 연재했고, 한국경제 ‘金과장 李대리’의 기획에 참여한 바 있다. 현재 PR 전문 매거진 ‘The PR’에서 홍보카툰 ‘ 미스터 홍키호테’의 스토리를 집필 중이며, PR 관련 강연과 기고도 진행 중이다. 저서로는 홍보 바닥에서 매운 맛을 본 이들의 이야기 ‘홍보의 辛(초록물고기)’이 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주소 :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6 트윈트리타워 B동 14~16층 대표전화 : 02) 724-8600
상호 : 서울경제신문사업자번호 : 208-81-10310대표자 : 손동영등록번호 : 서울 가 00224등록일자 : 1988.05.13
인터넷신문 등록번호 : 서울 아04065 등록일자 : 2016.04.26발행일자 : 2016.04.01발행 ·편집인 : 손동영청소년보호책임자 : 신한수
서울경제의 모든 콘텐트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복사·배포 등은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Copyright ⓒ Sedaily, All right reserved

서울경제를 팔로우하세요!

서울경제신문

텔레그램 뉴스채널

서울경제 1q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