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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꿈의 유효기간은 1년뿐" 벼랑끝 '사시 청춘'들

내년 마지막 사법시험 앞둔 신림동 고시촌 가보니


취업했어도 법조인 꿈 못버려 다시 고시촌으로 돌아온 그들

"로스쿨은 학비 부담에 포기… 내년 1차시험 죽어도 붙어야"

고시생 한때 3만명 생활했지만 폐지 결정이후 3,000명으로 뚝

"예전엔 상가건물이 꽉 찼는데…" 상인들도 매출 줄자 폐점 잇달아


뚝 떨어진 기온 탓이었을까. 이른 아침부터 학원으로, 독서실로 발걸음을 옮기는 신림동 고시촌의 수험생들은 잔뜩 어깨를 움츠렸다. 가끔 번화가의 여느 청춘들처럼 멋을 부린 젊은이들도 눈에 띄지만 이들은 대부분 수험생활 외에는 염두에 두지 않는 듯 편안한 차림이다.

서울경제신문 취재진이 신림동 고시촌으로 알려진 대학동 일대를 찾은 것은 아침기온이 유난히 찼던 지난 29일 아침. 한때 '사법고시의 메카'로 불렸던 이곳이지만 지나는 이들 중 사법고시생을 찾기가 쉽지만은 않았다. 녹두전을 파는 가게들이 모여 있는 녹두거리에서 10년 이상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는 한 상인이 이유를 설명해줬다. "지금 신림동에 사법고시생은 별로 없어. 사시를 폐지한다고 한 뒤부터 다 빠져나가서 지금은 7급 공무원이나 경찰간부, 법원 행정직 같은 시험 준비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야."

주변을 둘러보니 실제 사법시험 관련 학원보다 경찰학원이나 노량진에서 넘어온 유명 스파르타식 공무원 준비 학원 들이 더 많이 눈에 띄었다. 상인들의 말로는 최근 2년 새 생긴 경찰 학원만 3곳이라고 한다. 한 서점 주인은 "한때 이 지역에 사시생만 3만명이었다는데 지금은 3,000명 될까, 그 정도일 것"이라고 말했다.

2008년 국회는 사법고시를 폐지하고 대신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을 법조인 양성 통로로 만들겠다는 내용의 새로운 변호사시험법을 통과시켰다. '사업연수원 몇 기'라는 깃발로 모이는 끼리끼리 문화, 경제활동을 단절한 채 사시에만 매달리는 이른바 '사시 폐인' 같은 문제를 없애자는 취지였다. 이 법이 개정되지 않는 한 이제 사법고시는 내년을 마지막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이에 지금 신림동 고시촌에 남은 2,500여명의 수험생에게 내년에 남은 사시는 꿈을 향한 '마지막 사다리'다.

6년 전부터 매년 사시를 치르고 있다는 최모(33)씨는 "마지막 시험 하나 남았다는 압박감이 평소의 2~3배는 될 것"이라고 했다. 최씨는 "20대 때는 '또 하면 되지'라고 생각했었는데 이제 나이도 먹고 시험도 사라져버리고 떨어지면 부모님께 죄송하니까 더 압박감이 든다"고 힘없이 말했다.



김모(30)씨는 지난 6월부터 가족을 제외하고 외부 연락도 완전히 끊었다. 그녀는 "이번에는 죽어도 붙는다는 생각으로 하고 있다"고 잘라 말했다. 김씨는 원래 사학과를 졸업했다. 그렇지만 사실관계를 바로 세우고 억울함을 풀어줄 수 있겠다는 생각에 대학 입학 당시부터 사시를 꿈꿨다. "사실 사학과 졸업 이후 교대에 들어가서 지금 휴학 중이에요. 집에서는 안 되면 임용고시 보라고도 하는데 저는 그건 죽어도 싫거든요." 그녀는 막막함 때문인지 대화 중 눈물까지 글썽였다. "이번이 아니면 사시가 없어지니까 지금 벼랑 끝에 서 있는 것 같아요."

8년째 사시 공부를 하고 있다는 정모(33)씨도 "자괴감이 든다"고 했다. 수험생활을 시작하던 시절 80만원이면 족하던 생활비도 이젠 120만원으로 늘었다. 동네를 떠난 사시생들의 빈자리를 일반인들이 채우면서 물가도 덩달아 올랐기 때문이다. 이야기 내내 줄담배를 피우며 필터를 씹어대던 정 씨는 "집에 손 벌리기도 이젠 힘들어지고 내년이 마지막 시험이라고 하니까 이런 생각하면 안 되는 걸 아는데 요즘에는 자살 생각도 한 번씩 한다"고 털어놨다. 이어 "예전에 고시촌에 있는 고시생들이 자살하면 아무리 그래도 '왜 그랬을까' 했는데 이제 나도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게 무섭고 슬프다"고 말했다.

이런 막막함을 이기지 못하고 다들 떠났지만 마지막이라는 이유로 신림동으로 돌아오는 사람도 있다. 박모(43)씨가 그랬다. 그는 "2년 전 미련을 접고 다시는 돌아오지 말자며 떠났었지만 결국 변호사가 되고 싶어 다시 이곳에 오고 말았다"고 말했다. 그가 잠시 취업을 했던 곳은 서초동의 한 변호사 사무실. 사무직이었다. 그는 "일을 할수록 자존심이 상하면서 변호사가 되고 싶다는 열망이 커졌다"며 "사시가 없어지기 전이 법조인이 될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에 다시 도전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양모(34)씨는 대기업의 연구원으로 9년을 일하다 법조인이 되기 위해 신림동에 둥지를 틀었다. 양씨는 "책임연구원이 될 즈음에 우연히 접한 법학 수업에 마음을 뺏겼다"며 "이후 지난해 4월 세월호 참사 당시 한국 사회에 뭐라도 기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판사가 되기로 마음을 굳히고 모든 것을 접고 신림동으로 들어왔다"고 했다.

왜 로스쿨을 선택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양씨는 "대기업에서 9년 일한 경력이 있지만 사실 가진 게 별로 없다"고 입을 뗐다. 그는 "집안도 가난해서 중학교를 검정고시 졸업했고 독학으로 대학까지 갔지만 무명 대학이고 자격증을 10개 땄지만 공부와 일을 병행하느라 학점도 제대로 못 땄다"며 "로스쿨 제도에서 나같이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이 빛을 발할 수 있겠느냐"고 되물었다.

실제 고시촌에서 만난 사시생들이 가진 로스쿨에 대한 반감은 생각보다 컸다. 지방에서 올라온 30대 중반의 한 고시생은 "겉으로는 나이제한이 없을 수도 있지만 사실 서울에서 내 나이의 평범한 사람을 뽑아주는 로스쿨은 없다"며 "들어갈 학비도 없다"고 푸념했다. 한때 사무장으로 일했다는 박씨도 "사무실 내 로스쿨 변호사에게 사건이 배정되면 제대로 처리가 되지 못해 분란이 생기는 경우를 직접 봤다"며 "내 나이나 경제력으로 갈 수도 없지만 가고 싶지도 않다"고 말했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도 이런 지적을 의식해 지난 20일 그동안 계류 중이던 변호사 시험법 개정안 5개를 논의했다. 모두 사시를 폐지하지 말고 로스쿨과 함께 양립시키자는 내용이다. 다만 논의 당시 법사위원들 사이에도 찬반이 엇갈렸다. 한 수험생은 "결국 파워게임"이라며 "존치가 아무리 필요하다고 결론 난들 될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했다. 그는 다만 "설령 사시를 폐지한다 해도 우리 같은 고시생이 아직도 수천명인데 이들을 위한 출구는 만들어줘야 하는 것 아니냐"며 "적어도 폐지에 따른 대책이라도 내놓아야 한다"고 요구했다.

사시 폐지에 대한 우려는 인근 상인들도 마찬가지다. 이미 사시 준비생들이 크게 줄었고 덩달아 점포 매출도 내리막길을 걷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1980~1990년대 호황기에 10여개에 달했던 서점도 현재는 6~7곳으로 줄어들었고 고시촌 곳곳에서 찾을 수 있었던 '고시식당'도 이제는 3~4곳만 영업하며 명맥을 이어갈 뿐이다. 한 식당 주인은 "불과 10년 전만 해도 상가 건물 대부분이 3층까지 가게들로 가득했으나 현재는 2층까지 채워지기도 힘든 상황"이라며 "그만큼 고시 준비생이 감소하면서 가게 수익이 줄어든 탓"이라고 설명했다. /법조팀=안현덕·김흥록·서민준기자 always@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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