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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아 "당당한 모습의 안나, 제게 초심 깨우쳐줬죠"

■ 뮤지컬 '안나 카레니나'의 정선아 인터뷰





고전의 감동을 무대에서 고스란히 재현할 수 있을까. 수백 년 동안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은, 그것도 1,000여 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고전을 150분 분량의 뮤지컬로 압축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감정과 이성을 가진 개인이자 사회적 존재인 인간에게 필연적인 내적 자아의 충돌을 거대한 서사 속에 철학적으로 풀어낸, 대문호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는 영화, 오페라, 발레 등 수많은 예술 장르로 재탄생했지만 늘 ‘잘 해봐야 본전’이라는 평가를 받은 작품이기도 하다.

이달 초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국내 최초의 러시아 라이선스 뮤지컬 ‘안나 카레니나’의 베일이 벗겨지면서 가장 주목을 받은 배우는 단연 주인공 안나 역의 정선아다. 톨스토이가 구축해놓은 철학적 세계를 지나치게 단선적인 사랑이야기로 풀어버렸다는 일각의 혹평 속에서도 정선아에 대한 찬사만큼은 뜨거웠다. 이번 작품을 통해 단독 주연으로도 손색이 없을 만큼 강렬한 카리스마와 깊은 내면 연기를 보여준 덕분이다.

배우 17년차..매너리즘 빠졌을 때 ‘안나’ 덕에 인생2기

러 정서·깊은 내면 이해하려 원작 꿰고 이 악물고 연습

26일 서울 이태원의 한 커피숍에서 만난 정선아는 “지금까지 철없고 사랑에 빠져 어쩔 줄 몰라 하는 캐릭터를 주로 맡았는데 안나는 불같은 사랑을 하면서도 가슴 속에 묵직한 어둠을 품고 있는 캐릭터”라며 “감정 변화의 폭이 큰 만큼 고도의 내면 연기는 물론 저음부터 고음까지 넓은 범위의 음역대를 소화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고 털어놨다.

가창력과 끼, 화려한 외모를 골고루 갖춘 ‘타고난 뮤지컬 디바’로 꼽히지만 정선아는 철저한 노력파다. 본격적인 연습 전 원작이나 관련 영화를 교재 삼아 공부하고 고전물의 경우 당시 사람들의 생활상을 엿보기 위해 그림까지 꼼꼼하게 살핀다. 이번 작품 역시 국내에 출간된 모든 버전의 ‘안나 카레니나’를 반복해서 읽었다. 개막 직전에는 러시아로 건너가 오리지널 프로덕션인 모스크바 오페레타 시어터 무대를 수차례 보고 배우들의 감정 표현과 창법을 익혀오기도 했다.

“뮤지컬 배우로서 앞으로 이런 작품을 또 만날 수 있을까 싶더라고요. 게다가 국내에 러시아 뮤지컬을 처음으로 소개하는 거잖아요. 책임감이 많이 느껴졌죠. 그 시대의 색채나 사람들의 감정선을 몸으로 익히고 싶었어요. 이렇게 준비했더니 오히려 첫 공연 때 떨리기는커녕 날아오르는 기분이었어요. 이보다 더 많이 준비돼 있던 적은 없는 것 같아요.”

고등학교 3학년 때인 2002년부터 ‘렌트’ ‘아가씨와 건달들’ ‘아이다’ ‘에비타’ 등 대형 뮤지컬의 주인공 자리를 꿰찼던 정선아에게도 ‘안나 카레니나’는 크나큰 도전이었다. 정선아는 “직접적인 감정 표현도 서슴지 않는 알리나 체비크 연출을 보면서 안나의 당당하고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는 모습, 타협하지 않는 예술가의 면모가 이런 것이구나 깨닫게 됐다”며 특유의 긍정 에너지를 쏟아냈다.



“연습하면서 칭찬 한마디 들어보지 못한 건 이번이 처음이에요. 동선을 맞출 때도, 흐름만 짚어볼 때도 최고 성량으로 노래하고 연기하지 않으면 혼을 내는 거예요. 울기도 많이 울었지만 보드카처럼 뜨겁고 솔직한 게 러시아 사람들의 정서라고, 이걸 오히려 배워야 작품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이를 악물었어요.”

이런 노력 끝에 정선아는 안나의 내면을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고 한다. 안나가 기차에 몸을 던지는 결말은 ‘포기’가 아닌 ‘선택’이라는 자기만의 해석도 내놨다.

“안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는 사랑과 죽음이에요. 후회 없는 사랑을 했고 짜릿했고 행복했지만 그 사랑은 더 이상 내 옆에 없는 거죠. 그때 안나가 택하는 건 죽음이에요. 돌아갈 곳이 없어서 죽는 것이 아니라 사랑 다음으로 가장 숭고한 선택을 한 거죠. 그래서 제가 연기하는 안나는 기차가 올 때까지 기다리지 않아요. 사랑에 직접 다가선 것처럼 죽음에도 내가 먼저 한 발자국 다가서죠. 보이지 않지만 안나는 죽음을 웃으며 받아들여요.”

이번 공연에서 화려한 무대 세트 못지않게 주목받는 것이 완벽하게 고증한 19세기 러시아 의상이다. 정선아는 “관객들의 눈에는 화려한 드레스만 보이겠지만 그 안에 세 겹의 속옷을 받쳐 입어야 한다”며 “보통 뮤지컬에선 잦은 의상 교체 때문에 지퍼나 벨크로를 활용하는데 한 땀 한 땀 끈으로 묶는 코르셋을 고집하는 것을 보고 러시아 사람들의 장인정신을 배웠다”며 웃었다.



어느덧 데뷔 17년 차를 맞은 중견 뮤지컬 배우가 된 정선아. 뮤지컬이 인생의 전부였고 유일한 꿈이었기에 너무 이른 성공을 맛본 이후 매너리즘에 빠진 적도 있었다. “내 다음 꿈은 뭘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떠오르지 않았어요. 모든 게 공허하고 견디기 힘들었어요. 늘 무대에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하고 즐거웠는데 더 이상 행복하지가 않은 거예요.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이게 얼마나 감사해야 할 일인지 왜 모르냐고. 이 모든 건 보석 같은 관객과 동료들이 나에게 기회를 줬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니까 하루하루 나도 선물을 주는 마음으로 공연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부터 무대가 달리 보이더라고요.”

‘안나 카레니나’를 뮤지컬 배우 인생 2기를 열어줄 전환점으로 꼽는 이유도 여기 있다. “매일 공연을 마치고 나면 몸 안에 수분 한 점 남지 않은 것처럼 모든 것을 짜내고 나오는 기분이 들어요. 어릴 때 무대에 오르면 꼭 그랬거든요. ‘아! 처음으로 돌아갔구나’ 싶은 생각이 들게 하는 고마운 작품이죠.” 다음 달 25일까지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서은영기자 supia927@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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