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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칼럼]99.9%의 오만

손철 뉴욕 특파원





지난 24일 자정을 불과 1시간여 앞두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북미 정상회담을 전격 취소한다고 발표했을 때 한국에서 가장 놀란 사람은 누구였을까. 사견이지만 아마 정의용 청와대 안보실장이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두 번째는 문정인 대통령 통일외교안보 특보가 아니었을까 싶다.

정 실장을 첫 번째로 꼽은 것은 그가 단지 특급 정보를 국내에서 가장 빨리 알 수 있는 위치에 있어서가 아니다. 21일 한미 정상회담을 위해 워싱턴 DC로 향하던 전용기 안에서 정 실장이 기자들에게 한 말 때문이다. 그는 6·12 북미 정상회담이 싱가포르에서 예정대로 개최될지 묻자 “99.9% 성사됐다”고 장담했다.

청와대 출입기자가 올린 장문의 정 실장 간담회 내용 중 ‘99.9%’라는 숫자가 유독 머리를 맴돌아 잠시 생각해봤다. 99.9%는 때로 100%보다 더 대담하게 다가오는 확률이다. 외교부뿐 아니라 어떤 정부부처를 출입할 때 관료가 어느 자리에서건 그런 숫자를 입에 담은 적이 있었던가. 샅샅이 기억을 되짚어보려 애썼지만 온갖 말이 떠도는 여의도 정치판에서조차 들은 기억이 안 나는 숫자였다. 몇 년 전 어디선가 99.9%라는 수치를 본 것 같은 희미한 기억을 더듬어 보니 금은방이었다.

청와대가 수없이 강조한 대로 북미 정상회담에서 한국이 당사국이 아닌데다 문재인 대통령이 트럼프 대통령을 만나러 가기 전부터 이미 미국 주요 언론에서는 싱가포르 회담이 엎어질 가능성마저 제기되던 터라 정 실장의 엄청난 자신감은 오만으로 비칠 만큼 리스크가 커 보였다. 과연 트럼프 대통령은 다음날 한미 정상회담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도 전에 “북미 정상회담은 안 열릴 수 있다”고 진지하게 경고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에서 정 실장의 99.9%에는 별다른 근거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며 씁쓸해하고 있던 차에 문 특보는 23일 한 방송에 나와 한술 더 뜨는 말을 했다. 그는 “북미 정상회담의 연기나 불발 가능성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며 정 실장의 발언을 되풀이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터진 사달은 온 국민이 아는 대로다.

이쯤 되면 문 대통령이 트럼프의 회담 취소 소식을 보고받고 어떤 심정이었을지 궁금하다. 최측근 외교·안보 참모들이 북미 정상회담 성사 가능성은 99.9%라고 장담한데다 성공적 한미 정상회담으로 못까지 쳤다는데 하루가 안 돼 날아든 트럼프 대통령의 발표는 문 대통령에게 비수와도 같았다. 문 대통령은 뒤통수를 친 주범이 변덕쟁이로 악명높은 트럼프 대통령이라고 여겼을까, 아니면 중차대한 시기에 경솔한 판단으로 한 치 앞도 못 본 참모들이라고 생각했을까.

문 대통령이 국정원 라인을 가동하고 정 실장 못지않게 곤혹스러웠을 북측 당국과 전격적인 2차 남북 정상회담을 끌어내 구겨진 체면을 어느 정도 만회한 마당에 지나간 얘기를 새삼 꺼내 든 것은 한반도 비핵화에 앞으로 훨씬 중요한 시간이 많이 남아 있어서다. 북미가 최근 일주일 사이 판문점과 싱가포르·뉴욕 채널을 가동해 정상회담을 위한 실무협의에 진전을 보이고 있지만 이제 99.9%를 거론하는 일은 자취를 감췄다. 백악관은 30일에도 6·12 싱가포르 회담 개최를 낙관적으로 기대하면서도 ‘예상’이라는 꼬리표를 잊지 않으며 신중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역사적인 북미 정상회담이 마침내 열리면 그 성격상 회담은 ‘세기적 쇼’가 되어 전 세계를 들썩이게 만들 것이다. 그때 ‘순도 99.9%’의 오만함은 되살아날 채비를 할 것이다. 비핵화 작업이 짧게는 2~3년, 길게는 10년 이상 걸리는 난제임을 잘 아는 정부 당국자들이 조급해하거나 샴페인을 먼저 터뜨리면 지난 20년 세월이 증명하듯 또 쓰라린 실패를 맛볼 수밖에 없다. 풍운이 일고 있는 한반도에서 천려일실도 허용 않는 정부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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