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의 노후소득보장과 재정안정을 도모하려면 보험료율을 올리는 등 제도 개편을 해야 한다는 제안이 나오자 국민연금 폐지론까지 등장하는 등 사회적인 반발이 거세다.
장기적으로 부담은 늘고 혜택은 줄어든다는 국민의 불안감과 거부감이 작용한 결과다. 연금개혁 재논의의 첫발을 떼기도 전에 역풍이 거세게 불면서 정부도 곤란한 처지에 놓였다.
연금 개편을 둘러싼 갈등과 논란은 우리나라만의 일은 아니다. 노후보장수단으로 공적연금제도를 시행하는 거의 모든 국가가 통과의례로 겪어온 진통이다. 이 과정에서 권력이 교체되는 일이 적잖게 벌어졌을 만큼 ‘뜨거운 감자’다.
우리나라에서도 그동안 이런 갈등과 논란 속에 여야 정치권이 연금의 근본적인 개편을 미루고 ‘땜질’ 처방으로 무마하는 등 ‘시한폭탄 돌리기’로 일관하며 책임을 회피하는 양상이 반복돼 왔다.
21일 국민연금공단 등에 따르면 최근에 연금개혁을 놓고 진통을 겪은 곳은 중남미 니카라과와 러시아가 대표적이다.
니카라과 정부는 지난 4월 18일 부실해진 연금 재정을 건전화하는 취지에서 기업주와 근로자가 내는 연금보험료를 최대 22% 늘리되, 전체 혜택을 5% 줄이는 연금개혁안을 확정했다.
이런 계획이 발표되자 근로자, 학생 등 연금 예비 수령자들이 일제히 수도 마나과를 비롯해 전국 거리로 집결해 항의 시위를 벌였다. 이 과정에서 정부 건물이 파손되고 방화마저 일어나자 군인과 경찰이 배치됐고, 개혁안에 찬성하는 정부 지지자까지 거리로 나오면서 양측이 충돌하며 폭력사태로까지 비화했다.
이런 전국적인 항의 시위와 유혈 충돌은 약 일주일간 이어졌고, 그 결과 경찰관 2명을 포함해 최소 27명이 숨졌다. 시위 참가자 중 체포된 인원은 121명으로 추산됐다. 최악의 유혈사태가 발생하자 집권 11년차인 다니엘 오르테가 니카라과 대통령은 결국 지난 4월 22일 연금개혁안을 철회했다.
연금 개혁은 러시아에서도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으로 떠오르고 있다. 러시아의 푸틴 정부는 정년과 연금 수급 연령을 남성은 60세에서 65세로, 여성은 55세에서 63세로 단계적으로 늘리는 연금법 개정안을 지난 6월 14일 발표했다. 고령화에 따른 연금 기금 적자 등 재정부담을 덜기 위한 조처의 하나다.
논란을 의식한 듯 러시아 월드컵 개막 전날 발표했다. 하지만 여론의 반응은 상당히 부정적이었다. 월드컵이 끝나자마자 지난 7월 28∼29일 연이틀 러시아 수도 모스크바 등 여러 도시에서 정년과 연금수급 개시 연령 연장을 골자로 한 연금법 개정에 반대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수천명의 시위대는 모스크바 중심부 크렘린궁 인근에서 “푸틴은 도둑놈”, “차르 물러가라” 등 반정부 시위의 단골 구호를 외쳤다. 시위 참가자들은 연금 생활자들을 보호하고, 정년 연장 계획을 취소하며, 이 문제를 국민투표에 부칠 것을 요구하는 등의 구호가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거리를 행진했다. 시위대가 들고 있는 현수막에는 “우리 앞날을 도둑질하지 말라”고 글귀도 적혀 있었다. 일부 시위 참가자들은 내각 사퇴, 의회 해산을 촉구하기도 했다.
러시아 연금 개혁의 후폭풍은 ‘21세기 차르(황제)’로 통할 정도로 권력 장악력이 큰 푸틴 정부조차 뒤흔들 수 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연금법 개혁이 그동안 잠재돼 있던 푸틴 장기 집권과 경제난에 대한 국민 불만을 폭발시키는 ‘뇌관’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최근 공개된 러시아 여론조사에서 러시아인의 90%는 연금 수급개시 연령 상향 조정에 반대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80%를 웃돌던 푸틴 대통령의 콘크리트 지지율은 연금개혁 발표 후 50% 이하로 급격한 내림세를 탔다.
이 외에 세계 각국에서는 2000년 전후로 연금개혁에 나섰다가 국민 반발에 정권이 흔들린 사례가 적지 않다.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독일 총리와 니콜라 사르코지 전 프랑스 대통령, 로마노 프로디 전 이탈리아 총리,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일본 총리 등이 연금개혁에 손을 댔다가 줄줄이 중도 낙마하거나 정권 재창출에 실패했다.
“둘 다 덩치가 크고, 회색이며, 사람들한테 아주 인기가 많다. 몸이 육중해 움직이기 힘들다는 점도 빼닮았다.” 세계적인 연금전문가인 독일 브레멘대학교 칼 힌리히스 교수는 연금개혁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보여주고자 연금을 코끼리에 비유하기도 했다. 연금개혁을 둘러싼 세계의 진통을 도무지 꼼짝 않으려는 ‘코끼리 옮기기’로 에둘러 표현한 것이다.
이번에 연금 개편의 시동을 다시 건 우리나라에서도 ‘과연 덩치 큰 코끼리를 옮길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계속해서 제기된다. 상당수 전문가는 국민연금 등 사회보험을 개혁하지 않으면 ‘골든타임’을 놓칠 수 있다고 우려한다.
세계 최고 수준의 저출산·고령화 상황이 이대로 지속한다면 2025년에는 국민연금과 건강보험 등 4대 사회보험에서만 매년 22조원에 달하는 적자가 발생할 것으로 전망되는 만큼, 개혁이 절실하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세계에서 유례없는 초저출산으로 보험료를 낼 청·중년층은 급격히 줄어들고, 연금이 필요한 노인은 급증하면서 공적연금의 지속 가능성에는 이미 ‘경고등’이 켜진 게 현실이다.
전문가들은 보험료율 인상을 포함한 재정 안정화 방안을 추진하려면 먼저 사회적 합의 기구를 구성해 연금개혁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 형성을 위한 대국민 설득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한다.
윤석명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연구위원은 “몇 가지 조건만 바꾸면 된다는 평면적인 접근으로는 연금문제를 풀 수 없다”며 “복잡한 사회변화를 제대로 반영할 수 있는 다이내믹한 접근이 필요하고 변화에 따라 제도를 계속 고쳐야 한다는 공감대를 만들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서영인턴기자 shyung@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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