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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인의 예(藝)-<98> 이만익 '해맞이']막 떠오른 동그란 태양...새해 축복 염원을 담다

초창기엔 자유로운 붓질 추구했지만

유화부인·심청 등 구전 여인 그리며

가장 한국적인 서양화가로 평가받아

1988년 서울올림픽 미술감독 맡아

'좋은 날' '오작교' 등 판화 20점 제작

한국의 정서·아름다움 세계에 과시

이만익 ‘해맞이’ 1989년, 종이에 실크스크린, 45x65.4cm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우뚝 선 두 그루 나무 사이로 분홍과 연초록의 상서로운 구름이 피어올랐다. 말간 얼굴을 방금 내민 동그란 태양이 그림 한가운데를 차지했다. 막 떠오른 해의 온화한 기운이 주변 하늘을 노랗게 물들였다. 태양 빛이 먼 바다의 파도와 해안가 절벽까지 따뜻한 보라색으로 감싼다. 학들이 힘차게 날개 펼치고 줄지어 날아간다. 그림의 양쪽을 지탱하는 붉은 나무의 기세가 범상치 않다. 활짝 펼쳐 든 이파리가 부채처럼 크고 팽팽하다. 잎이 5개라 그런지 조선 왕실에서 사용된 ‘일월오봉도’를 떠올리게 한다. 해와 달과 변하지 않는 다섯 산봉우리의 기상이 영원불멸을 기원했듯 그림 속 붉은 나무가 찬란한 축복을 향해 팔 벌린다. 가장 한국적인 서양화가로 불리는 이만익(1938~2012)의 판화 ‘해맞이’이다.

이만익 ‘좋은날’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1938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난 이만익은 해방 전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손을 잡고 6남매가 함께 월남했다. 서울 효제초등학교 2학년으로 편입해 미술반에서 수채화를 배운 것이 그림 생활의 시작이었다. 경기중학교 3학년이던 1953년 제2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이하 국전)에 ‘정동의 가을’과 ‘골목’을 출품해 입선했다. 중학생의 국전 입선이 논란을 일으켰고 그 계기로 국전 출품자격에 ‘대학 3년 이상’이라는 조항이 추가됐다.

이후 서울대에 입학한 이만익은 이봉상(1916~1970)이 젊은 화가들의 공동작업실로 마련해 준 일명 ‘안국동 화실’에서 박서보·김창열 등 선배들과 김봉태·김종학·윤명로 등의 동료들과 뚝심 키우는 나날들을 보냈다. 국전 출품의 나이제한을 충족하게 된 대학 3학년 때 다시 출품해 특선을 하고, 졸업 후까지 3년 연속 특선을 했으나 이어 연거푸 낙선의 고배를 마시면서 제도권 예술에 환멸을 느꼈다. 고민 끝에 화가는 백일 된 아들을 품에 안은 아내를 두고 1973년 파리 유학길에 올랐다.

이만익 ‘오작교’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초창기 및 프랑스 시절의 그의 붓질은 자유로움 그 자체였다. 이전의 이만익이 램브란트·루오·도미에·고갱·고흐·피카소 등을 탐구하며 표현주의를 섭렵했다면 파리에서 그는 기존의 경향을 지우고 자신만의 길을 찾아갔다. 자유로움 끝에 터득한 단단한 조형성은 인물과 대상을 의도적으로 평면적이고 간략하게 간추렸다. 대담해졌다. 대상의 윤곽을 보여주는 검고 굵은 테두리는 확고함을 더했다. 표현적이던 그림이 이지적인 상징주의로 돌아섰다. 강렬한 색채도 그랬다. 여기에 타국에서 깨달은 역사의식이 우리의 설화를 더듬고 고유한 감성을 찾게 했다. 고구려 건국 신화에 등장하는 주몽의 어머니이자 해모수의 딸인 유화부인을 그린 게 대표적이다. 구전으로만 전하는, 얼굴 없던 여인상이 이만익의 손에서 새롭게 태어났고 이는 ‘뮬란‘과 ‘포카혼타스’가 그간 디즈니 애니메니션이 만들어둔 공주 이미지의 철옹성을 깨뜨린 것 만큼이나 신선했다. ‘심청전’ ‘춘향전’ ‘흥부전’ 등 판소리 주인공들도 그림에 등장했다. 아버지 눈을 뜨게 하려고 배에서 바다로 뛰어드는 심청을 한 떨기 꽃봉오리처럼 그려 간절함을 더했고, 흥부네 박 타는 장면에서는 아이가 열아홉이나 바글거려 돈보다 더 소중한 풍요로움을 얹었다.

‘한민족의 얼과 자화상을 가장 한국적으로 그리는 현대화가’로 평가받은 이만익은 1988년 서울올림픽 미술감독을 맡았다. 세계가 처음 아시아 끝자락의 대한민국을 주목하던 그 자리에서 이만익은 한국적인 정서와 아름다움을 과시했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한 20점의 판화는 올림픽을 위해 제작된 목판화들로, 앞서 본 ‘해맞이’도 그중 하나다. 이 판화의 원작은 1987년에 그린 유화 ‘신단일출도’인데 폭이 3m에 이르는 대작이다.



다른 하나의 작품인 ‘좋은 날’은 천도복숭아 나무 아래서 선녀 둘이 악기를 연주하고 있는 그림이다. 하늘과 땅이 조화를 이루는 태평성대에 대한 기원을 담아 본다. 휘영청 뜬 달을 뒤로 하고 까치가 날아가는 ‘오작교’는 견우와 직녀의 전설을 담고 있다. 만남과 헤어짐의 아쉬움을 품은 그림 앞에서 남북으로 헤어진 한반도의 평화를 빌어 본다. 고무신 벗어 던지고 나무에 올라 꽃가지 꺾으며 노는 아이들을 그린 ‘새싹’은 88서울올림픽 개회식의 테마 중 하나로, 정적이 지난 자리에 새싹이 돋아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만익 ‘새싹’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이만익은 그림 뿐만 아니라 글 잘 쓰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그림과 곁들여 ‘삼국유사’를 집필했고 자신의 그림을 ‘말하는 그림, 소리 없는 시’로 천명하고 ‘그림은 시이고 시는 그림’이라는 소신으로 작업했다.

“다분히 내 성향 탓이겠지만 나는 그림이 어렵고 모호해지는 것을 싫어한다. 그림이 자꾸만 어려워져서 공허한 논리로 옹호되어야 하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재능껏 잘 그린 그림과 좋은 그림과는 현격한 차이가 있는데 ‘좋은 예술, 좋은 그림’은 개인의 소리가 아닌 사회의 소리, 인간의 소리라야 하고 이는 어떤 근거로든 인간의 보편적 감성에 교감되어야 할 것이라 믿는다.”

진실은 아무리 멀리 내다 버려도 반드시 돌아온다 했고, 작가의 진심은 아무리 먼 곳이라도 가 닿고야 만다. 이만익의 그림은 대중과도 소통했고 창작뮤지컬 ‘명성황후’와 ‘댄싱섀도우’ 등의 포스터로 쓰이며 폭넓게 사람들과 만났다.

이만익 ‘강복’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예로부터 새해에는 세화(歲畵)라 하여 축복 담은 그림을 주고받았다. 조선 시대 왕실에서 신하에게 세화를 하사하던 풍습이 사대부를 거쳐 민간에까지 퍼졌다. 떠오르는 붉은 해를 배경으로 소나무 위에 걸터앉은 학, 호랑이와 까치를 나란히 그린 민화 등이 세화로 쓰였다. 지금은 연하장이 그 흔적으로 남았고 그마저도 요즘은 이메일과 휴대폰 메시지, 이모티콘 등으로 대체되기는 했지만. 달력은 지난 1월 1일부터 2019년 새해를 시작했건만 아무래도 우리 기분은 전통 명절인 설날까지 ‘진짜’ 새해맞이를 미루곤 한다. 세화 느낌 물씬 풍기는 이만익의 그림을 앞에 놓고, 새로운 해가 떠오르기를 기다리고 있다.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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