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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저널 그날’ 우리가 모르는 1919년 3월 1일…‘조선독립만세!’

사진=KBS 제공




3일 방송되는 KBS1 ‘역사저널 그날’에서는 ‘3.1운동 100주년 기획 2편 - 조선독립만세!’ 편이 전파를 탄다.

▲ 우리가 모르는 1919년 3월 1일

3·1운동은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모두 다 안다고 생각한다. 과연 그럴까? 3·1운동하면 상징처럼 떠오르는 이미지. 바로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그런데 ‘태극기’는 없었고, 구호도 ‘대한독립만세’가 아니었다면?

▲ 민족 대표 33인에 관한 진실

3·1운동의 구심점이 된 민족 대표 33인. 목숨을 걸고 독립선언을 했지만 ‘태화관’과 관련해 최근 일부에서 제기하는 비판과 오해. 민족대표 33인은 왜 독립선언 장소를 ‘탑골공원’에서 ‘태화관’으로 옮긴 걸까?

▲ 3·1운동에 대한 끔찍한 보복



3·1운동의 확산에 당황한 일본은 군대를 동원해 학살과 방화를 일삼는다. 그 대표적 사건이 우리가 알고 있는 ‘화성 제암리 학살사건’이다. 그런데 3·1운동에서 민간인이 가장 많이 학살된 곳은 ‘제암리’가 아닌 평안남도 맹산군. 일본군대의 조준사격으로 54명이 사망한 ‘맹산학살’은 일제도 공식문서에서 인정할 만큼 가장 큰 희생자를 낸 곳이다.

▲ 3·1운동을 막으려는 움직임

확산일로인 3·1운동에 일본뿐만 아니라 내부에서도 3·1운동을 저지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난다. 부끄럽지만 잊지 말아야 할 역사의 한 부분! 이완용을 위시한 친일파들의 준동이 이어진다. 그중 3·1운동의 자제를 외친 친일단체 ‘자제단’이 있었다. 단장은 뼛속까지 친일파인 ‘박중양’. 해방 후에도 3·1운동과 독립 운동가들을 조롱하는 망언을 했던 그의 공덕비는 아직도 그대로 남아있다.

일제와 친일파가 가혹하게 탄압할수록 3·1운동은 들불처럼 더 번져나간다. 그래서 결국 일제는 ‘이 방법’까지 동원하게 된다. 과연 일제가 내민 최후의 카드는 무엇이었을까?

/김호경기자 khk010@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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