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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백남준을 만나다]통념 부정 '문화 테러리스트'...엄숙주의 예술을 조롱하다

< 3 > 예술은 사기다
1984년 35년만의 귀국 기자회견
"예술은 사기 중 고등사기" 폭탄발언
"현대미술의 얄팍함 스스로 비판"
"군부시절 저급한 정치 빗댄 것" 등
짧은문장 놓고 갖가지 분석 쏟아져
反예술주의 정신 계승한 백남준
유의어 반복하는 '토톨로지' 어법
말장난에 기반 '아재개그'로 봐야

[인간 백남준을 만나다]통념 부정 '문화 테러리스트'...엄숙주의 예술을 조롱하다

[인간 백남준을 만나다]통념 부정 '문화 테러리스트'...엄숙주의 예술을 조롱하다
피아노와 미학을 전공하고 ‘비디오아트’의 창시자가 된 백남준은 기존의 통념을 뒤집는 ‘문화테러리스트’로 불렸지만 늘 낙천적인 표정에 유머를 잃지 않았다. /사진제공=박영덕

“예술은 사기다. 예술은 사기 중의 사기이고 그것도 아주 고등사기인 셈이다.”

1984년 6월 22일 오후 8시 대한항공편으로 백남준이 입국했다. 지난 1949년 온 가족이 홍콩으로 이사하면서 한국을 떠났으니 35년 만에 고국 땅을 밟은 것이었다. 금의환향하는 백남준을 보기 위해 취재진이 김포공항을 에워쌌다. 낡은 흰 셔츠를 입고 헐렁한 바지에 멜빵을 멘 백남준이 일본 출신의 비디오작가이자 아내인 구보다 시게코와 나란히 입국장으로 들어서자 카메라 플래시가 빗발쳤다.

“많이 발전했다는 얘기는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근사한 공항을 갖고 있는지는 몰랐다”며 해맑게 웃으며 걸어 나온 백남준을 좀 더 붙들어 앉힌 현장 기자회견이 마련됐다. 왜 왔느냐는 질문에 “한국의 미인을 만나러 왔다”고 답하는 기인(奇人)이었으니 묻고 싶은 게 많을 만 했다.

“왜 이렇게 늦었냐고요. 그렇게 됐어요. 인생은 일장춘몽, 웃고 즐기는 사이에 세월 다 갔지요. 꿈같은 인생 속에 늦고 빠르다는 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열심히 살다 보니 이제서야, 그것도 잠시 들른 것뿐인데요.”

진심 담은 대답이었건만 사람들의 표정을 보니 만족스런 답변은 아니었나 보다. “그런데 이번엔 좀 달라요. 오고 싶었고 또 서울서 할 일도 있고요. 특히 형제들과 친구들을 오랫동안 못 만났는데 이 기회에 만나봐야겠어요”라고 덧붙였다. 백남준이 특유의 낙천적인 표정을 지으며 “경기중학 동창이 서울시장(염보현 전 서울시장)이 됐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한 번 찾아가 굽신해둬야겠다”고 했을 때는 웃는 이도 있었고 “수송국민학교와 경기중학 동창생인 시사만화가 백인수를 만나고 싶다. 유치원 동창인 소꿉친구 이경희가 보고 싶다”고 할 때는 타지에서의 떠돌이 삶이 참으로 길었음을 공감할 수 있었다.

[인간 백남준을 만나다]통념 부정 '문화 테러리스트'...엄숙주의 예술을 조롱하다
29일(현지시간) 홍콩에서 열린 서울옥션 홍콩경매에 출품된 백남준의 ‘로봇 서커스 페인트’(왼쪽) 옆에 ‘비디오 소나타’ 연작인 ‘Video Sonata OP.56’과 ‘Video Sonata OP.57’ 두 점이 나란히 걸려 있다. 3월 말 홍콩에서는 아트바젤(Art Basel)을 위시한 아트페어와 경매가 집중적으로 열려 수조 원대 규모의 작품이 거래된다. 백남준이 살았더라면 “예술은 사기다”고 꼬집었을지도 모른다. /사진제공=서울옥션

쏟아지던 질문은 자연스레 ‘예술이란 무엇인가’로 쏠렸다. 전위예술(Avant-garde Art)이 무엇이냐 묻자 백남준은 “사실은 나도 알 수 없는 그런 것”이라 대답했다. 굳이 설명을 한다면 “아무나 가질 수 있거나 만질 수 없는 그런 것, 그래서 삼라만상 온갖 잡념을 쓸어 넣은 심오하고 희귀한 세계”라고도 했다.

“인생은 싱거운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짭짤한 맛을 넣어야 제맛이 나지요. 그리고 전위예술이라는 것은 정의 내리기가 불가능하다고 봐요. 하기야 그 뜻을 알 필요도 없고 또 내가 설명해 줄 이유도 없지만. 예술은 밋밋한 이 세계에 양념과 같은 것입니다. 이 상투적인 세계에 그나마 예술적 충격이 없으면 인간들은 정말 스스로 파멸할 것입니다. 예술이 위대해서가 아니라 건조한 세상이 재미없다 보니 예술이 비정상적으로 보이고 때로는 위대한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이와 함께 백남준은 “예술은 사기다”라는 폭탄선언을 한다. 왜 그랬을까. 무슨 의미였을까. 유럽과 미국에서 훨씬 먼저 이름 날린 백남준의 별명은 ‘동양에서 온 문화테러리스트’이자 ‘황색 재앙’이었다. 그런 그가 뱉은 말이니 사람들은 짧은 문장을 두고 갖가지 분석을 들이댄다. 엄숙·진지주의 예술에 대한 조롱이라는 것부터 현대미술의 얄팍함을 스스로 비판한 것이라는 해석이 있다. 1984년 당시가 전두환 군부 시절이라는 점으로 미루어 저급한 정치에 빗대 예술을 고등사기라고 했다는 주장도 나온다. 백남준이 말한 ‘사기’를 사마천이 쓴 중국 역사서 사기(史記)로 보고, 역사를 기록하는 것이 곧 예술이라는 식으로 풀어 설명하는 이도 있다. 백남준이 ‘역사덕후’로 유명했고,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의 ‘다다익선(多多益善)’이 ‘사기’ 중 ‘회음후열전’에 등장하는 고사성어라는 점으로 미루어 짐작한 것일 수도 있으나 그렇게까지 확대 해석한 것이 대다수의 동의를 얻기는 어렵다. 백남준은 김부식의 ‘삼국사기’보다는 일연의 ‘삼국유사’를 더 좋아할 정도로 지배층 관점에서 쓴 제도권 역사에는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는 편이 아니었다. 한민족의 주체성을 그 누구보다 강조한 그가 중국중심의 역사기술로 자신의 예술을 말했을 리도 만무하다.

[인간 백남준을 만나다]통념 부정 '문화 테러리스트'...엄숙주의 예술을 조롱하다
백남준 ‘고속도로로 가는 열쇠’. 오늘날의 인터넷처럼 세계 모든 나라가 서로 케이블 TV로 연결될 때 일어날 수 있는 현상을 예견한 백남준의 1973년작 ‘글로벌 그루브’를 중심으로 한 ‘백남준 미디어 n 미데아’ 전시가 경기도 용인 백남준아트센터에서 열리고 있다. /사진제공=백남준아트센터

정준모 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실장은 백남준의 ‘예술은 사기다’를 플럭서스(Fluxus)의 입장에서 봐야 한다고 강조한다. 플럭서스는 유연하다는 뜻의 플렉서블(flexible)과 어원이 같은 ‘변화’, ‘움직임’, ‘흐름’이라는 뜻의 라틴어에서 가져온 이름으로 1960년대 초부터 1970년대에 걸쳐 일어난 국제적 전위예술 운동을 말한다. 반(反)예술주의인 ‘다다이즘’ 정신을 계승했고 기존의 예술을 뒤집는 의외성을 보이며 다양한 퍼포먼스를 벌였고 거창한 의미를 담아 엄청난 가격에 거래되는 미술품들을 조롱하기도 했다. 정 전 학예실장은 “백남준은 플럭서스 때부터 ‘토톨로지(Tautology)’ 어법으로 말장난에 기반한 발언을 많이 했다”면서 “그런 유머와 해학적 의미로 예술을 사기라고 얘기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수학이나 논리학에서 ‘토톨로지’는 변수가 참이든 거짓이든 항상 진리 값이 되는 항진명제(恒眞命題)를 뜻하며 유의어를 반복하는 어법이다. 음악에 비유하자면 반복적 리듬의 테크노 음악이 있고, 미술에서는 특히 미니멀리즘에서 같은 형식의 반복을 보이는 경우가 있다. 토톨로지에 입각하자면, 이렇게 해석해도 저렇게 해석해도 다 괜찮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박영덕 박영덕화랑 대표는 “1990년에 갤러리현대와 원화랑에서 열린 백남준 개인전 제목이 ‘보이스 복스’였는데 백남준의 동료 예술가 요셉 보이스(Joseph Beuys)의 목소리(독일어 vox)라는 뜻이며 영어로 쓰면 ‘보이스 보이스(Beuys Voice)’가 된다”고 말한다. 그런 말장난이 백남준식이라는 얘기다.

백남준 곁에서 그와 자주 대화 나눈 엔지니어 이정성 아트마스타 대표는 “당시 우리 기자들이 너무 경색돼 유머와 해학적 의미를 웃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면서 “백 선생은 이따금 ‘나 같은 직업의 작가와 정치인은 좋든 나쁘든 입길에 오르고 일년에 한두 번씩은 시끄럽게 신문에 나야 하는 거야’라며 ‘크게 데미지 안 가는 스캔들이면 나쁘지 않다(Not Bad)’라고 하셨던 만큼 일부러 퍼포먼스처럼 이목을 집중시키기 위해 그런 발언을 했다고 본다”고 말했다. 웃자고 던진 ‘아재 개그’를 우리가 너무 심각한 ‘다큐’로 받아들인 것일 수 있다는 지적이다.

백남준이 한국에서 갑작스런 유명세를 탄 것은 1984년 1월2일 새벽, 서울과 뉴욕·파리 등을 연결한 글로벌 위성쇼 ‘굿모닝 미스터 오웰’의 방영이 결정적이었다. 그 직후 프랑스 일간지 ‘리베라시옹’이 백남준을 인터뷰했다. 백남준은 한결같았다. 이제 유명해졌으니 돈도 많이 벌겠다는 기자의 질문에 백남준은 “지금까지는 가난해서 행복했지만 앞으로는 부자가 되어 불행해지겠다”고 답했다. 이 말은 그대로 프랑스 신문의 제목으로 쓰였고, 한국에서도 “예술은 사기다”가 신문 제목으로 이목을 끌었다.

[인간 백남준을 만나다]통념 부정 '문화 테러리스트'...엄숙주의 예술을 조롱하다
백남준이 1984년에 동판화로 제작한 ‘1984년의 침입자들’. 백남준의 드로잉과 판화에는 늘 장난기가 서려있고 그 자신은 스스로 ‘사기꾼’이라 불리는 데 망설임이 없었다.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물론 사기(詐欺)라는 표현을 통해 백남준이 자신에 대한 한국에서의 선입견을 어느 정도 의식하고 있었음을 추론할 수도 있다.

백남준이 유력 언론을 통해 국내에 소개된 것은 1962년 연말의 일이다. 그 해 12월 4일자 동아일보는 ‘반(反)음악이라는 이름의 음악’이라는 기사에서 “돈 사람인지 예술가인지 알 수 없는 사람들의 연주회”라는 보도로 백남준의 공연을 다룬 바 있다. 그 후 백남준이 국내 언론의 조명을 받은 것은 1967년 5월인데, 첼리스트 샬롯 무어만과의 나체 퍼포먼스로 경찰 체포되면서다. 옷 벗기는 공연 때문에 경찰에 연행돼 관객들이 즉석에서 거둬준 보석금으로 가까스로 풀려났고, ‘과잉노출 및 외설죄’로 유죄판결을 받았다는 사실이 외신을 타고 알려졌다. 깊이 있는 예술에 대한 소개는 없었고 화제성 기사 일색이었다. 한국뿐만 아니라 미국에서도 그의 앞선 예술이 쉽게 받아들여질 수 없는 시대이기도 했다. 이후 1982년 5월 “백인 이외의 소수민족들에 대해서는 어지간히 콧대가 높다는 휘트니미술관에서 개관이래 처음으로 유색인종으로서 ‘백남준 비디오 쇼’를 열었다”는 소식이 전해질 때도 백남준은 기인이었다.

그러니 자신을 사기꾼으로 볼 테면 봐 보라는 식으로 ‘예술은 사기다’를 선언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이 또한 분분한 해석 중 하나다. 다만 백남준이 1984년 6월의 입국 기자회견에서 “별난 소문을 뿌리며 해프닝 인생을 살기 시작한 것은 벌써 고리짝 때 얘기”라며 20년 전부터 시작된 자신의 예술세계를 언급했고 “언젠가는 국내에서도 전시회를 열겠지만 내 자신이 좀 알아주는 수출품이기 때문에 한동안은 지구 외곽을 계속 떠돌아다닐 수밖에 없다”고도 못 박았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백남준 연구자로 유명한 평론가 이용우 전 광주비엔날레재단 대표이사는 “백남준이 말하는 ‘예술사기론’은 사실상 그의 예술적 실천을 위해 기존의 가치를 부정하고 공격하며, 기상천외한 언어를 통한 시선 끌기와 도발적 제스처 등을 보여 온 ‘플럭서스’ 철학에 가깝다”며 “1960년대 초부터 백남준의 거의 전 예술작품에 등장하는 중심적 문맥이며 일종의 매너로, 기존의 가치를 부정하고 공격하며 기상천외한 언어를 통한 시선 끌기와 도발적인 제스처를 보여주는 것 등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훗날 다른 평론가와의 인터뷰에서 백남준은 좀 더 자상하게 설명했다. “전위예술은 한마디로 신화를 파는 예술이다. 자유를 위한 자유의 추구이며, 목적 없는 실험이기도 하다. 규칙이 없는 게임이기 때문에 객관적 평가란 힘들다. 어느 시대건 예술가는 자동차로 달린다면 대중은 버스로 가는 속도다. 원래 예술이란 반이 속이고 속는 사기다. 사기 중 고등 사기다. 대중을 얼떨떨하게 만드는 게 예술이다.”

그의 본의와 저의를 따져본다면 백남준의 ‘예술사기’는 역사 얘기가 아니라 새로 쓰는 신화에 더 가깝다. 두고두고 ‘예술사기론’을 우려먹은 그는 나중에 “만약 현대예술이 고등사기라면, 비디오는 5차원의 사기다”라는 말까지 남겼다. 정말 백남준이 ‘사기꾼’이었다면 그는 사람의 마음을 훔치는 사랑의 ‘도둑질’ 만큼이나 결코 미워할 수 없는 존재였으리라. 백남준의 예술은 모르는 척 눈 감고 당해 주고 싶은 ‘사랑스런 사기’였다.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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