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종목 시세보기

서울경제

HOME  >  오피니언  >  기획·연재

[오늘의 경제소사] 세일럼 마녀 재판

1692년 첫 교수형 집행

[오늘의 경제소사] 세일럼 마녀 재판
미국 매사추세츠주에 있는 세일럼마녀박물관

지난 1692년 6월 10일 영국의 매사추세츠 식민지 항구도시 세일럼. 60세 여성 브리짓 비숍의 목에 밧줄이 걸렸다. 세일럼 마녀 재판(Salem Witch Trials)의 첫 희생자가 나온 이래 모두 18명이 교수대에서 목숨을 잃었다. 세일럼 마녀 재판을 소녀들이 희생된 재판으로 잘못 아는 경우가 많지만 교수형 당한 19명 중에 30대 3명, 40대 3명, 50대 3명을 빼고는 모두 환갑을 넘긴 나이에 ‘사탄의 자식’으로 찍혔다. 돈을 악착같이 모았거나 행실이 나빠 평소 미움받던 사람들이 주로 죽었다.

청교도들이 세운 북미 식민지에서도 유난히 종교적 색채가 강했기 때문일까. 북미에서 간헐적인 마녀 소동으로 몇몇이 죽었지만 세일럼은 이전과 달랐다. 무엇보다 규모가 컸다. 교수형(여자 15명·남자 4명) 이외에도 고문으로 1명, 감옥에서 5명이 죽었다. 마녀 또는 마귀로 지목돼 체포된 사람만 186명에 이른다. 연쇄 고발로 끝없이 커져 가던 마녀 소동은 1693년 해가 바뀌며 잦아들었다. 보물선 발견으로 갑자기 횡재하고 총독 자리까지 받은 윌리엄 핍스의 부인까지 마녀로 지목되자 식민지의 상류사회는 사건을 서둘러 덮었다.

도시 이름부터 예루살렘의 옛 이름에서 따왔다는 경건한 도시, 세일럼에서 왜 이런 광풍이 일었을까. 원주민과 전쟁, 본국과의 관계 등 식민지의 정치가 혼란해진 가운데 이주 초기의 신앙 순수성에 대한 회복 욕구가 맞물렸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경제적 갈등도 배경의 하나다. 가문끼리 토지분쟁 끝에 고발경쟁을 펼쳤다. 귀리나 밀의 곰팡이균에 집단 감염돼 집단 발작으로 이어졌다는 풀이도 나온다. 원인은 불명확하지만 세일럼 마녀 재판은 확실한 영향 두 가지를 남겼다.

첫째, 마녀 재판을 부풀렸던 의도와 다르게 종교적 경직성에 대한 반감이 널리 퍼졌다. 20세기 초 미국 역사가 ‘조지 버’는 세일럼 마녀 소동으로 신정(神政) 정치가 설 자리를 잃었다고 분석한다. 둘째, 빠르게 반성했다는 점이다. 판결 5년 뒤 보조판사였던 새뮤얼 시월은 잘못이 수치스럽다며 속죄의 날을 정해 죽을 때까지 지켰다. 매사추세츠주는 1711년 공식 사과하며 유죄 기록을 지웠다. 다른 재판관의 후손이던 너새니얼 호손은 선대의 죄를 조금이나마 씻겠다는 생각에 소설 ‘주홍글씨’를 썼다. 요즘에도 가끔 보이는 마녀사냥. 세일럼의 경우는 특별하다. 재빨리 뉘우치는 양심의 복원력이 부럽다. 반성은커녕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들이 목소리를 높이는 곳도 있는데….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XC
이 기사를 공유하세요.

이메일 보내기

보내는 사람

수신 메일 주소

※ 여러명에게 보낼 경우 ‘,’로 구분하세요

메일 제목

전송 취소

메일이 정상적으로 발송되었습니다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