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와 맹자는 시렁 위에 얹어두고 나라를 되찾은 뒤에 읽어도 늦지 않다. 망한 나라에서 조상을 모시는 것이 부끄럽다.” 석주 이상룡 선생은 경술국치 이듬해 경북 안동 고향 집 임청각에서 비장한 각오로 조상의 신위와 위패를 땅에 묻었다. 그는 50대 중반의 나이에 일가족을 이끌고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망명했다.
선생은 부잣집 종손으로 물려받은 전답과 99칸짜리 집을 모두 처분해 모은 독립운동 자금으로 이회영 선생과 함께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일생을 무장투쟁에 바쳤다. 임시정부가 대통령제에서 국무령 체제로 바뀐 후 초대 국무령이 되기도 했다. 아들과 손자·며느리 등 3대에 걸쳐 10명이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선생의 가문은 이회영·허위 선생의 가문과 함께 3대 항일운동 가문으로 불린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상이다.
임청각은 이상룡 선생이 태어나고 자란 곳이다. 세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원의 여섯째 아들 이증이 터를 잡고 그의 셋째 아들 이명이 1519년에 집을 지었다. 올해가 500년으로 현존 살림집 중 가장 오래됐다. 경북 안동시 영남산 기슭에 계단식으로 기단을 쌓아 안채·중채·사랑채·사당·행랑채·별채 등 99칸을 지었다. 궁궐이 아닌 사대부 집으로는 가장 크게 지을 수 있는 규모로 보물 제182호다. 집 앞으로는 낙동강 상류가 지나간다. 임청각이라는 이름은 중국 남북조시대 도연명의 시 ‘귀거래사’에서 유래했다. ‘동쪽 언덕에 올라 길게 휘파람 불고 맑은 시냇가에서 시를 짓기도 하노라’라는 구절에서 임(臨)자와 청(淸)자를 따왔다. 실제 풍취 그대로다. 이웃한 도산서원에 머물던 퇴계 이황 선생이 현판 글씨를 직접 썼다. 안동 고성 이씨 가문에서 독립운동가들이 끊이지 않자 1942년 일제는 정기를 끊는다며 임청각 일부를 헐고 마당을 가로질러 중앙선 철로를 놓기도 했다. 요즈음 강제징용 보상 판결에 경제보복을 해오는 꼴이 그때 그대로인 듯하다.
판교에 있는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장서각이 8월17일까지 ‘임청각, 그리고 석주 이상룡’을 주제로 기획전을 연다. 2004년 임청각 관련 문헌·유물 5,000여점을 기탁받은 한중연이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석주 선생 자료를 중심으로 16건을 선보인다. 휴가 중 들러 임청각에 연결된 선비정신과 독립운동의 숨결을 느껴보면 참 좋을 것 같다. /오현환 논설위원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