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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경제소사] 드레이크 세계일주 항해

1577년 세계역사 바꾼 두번째 일주

프랜시스 드레이크




1577년 12월13일, 영국 남부 플리머스항. 엘리자베스 여왕의 은밀한 명령은 물론 노략질 허가까지 받은 선단 5척이 닻을 올렸다. 가장 큰 기함 펠리칸호가 150톤에 불과하고 선원을 다 합해도 147명이었으나 선단은 자신감에 넘쳤다. 여왕의 지원에 프랜시스 드레이크(사진)가 지휘를 맡았기 때문이다. 드레이크는 당시 30대 중후반의 나이였으나 어려서부터 사촌 형을 따라 어업에서 해적질, 스페인 보물선 탈취에 이골이 났던 인물이다. 국가가 인정한 해적질, 즉 사략선 선장으로 유명한 그의 휘하라면 큰돈을 만질 수 있다고 믿었다.

일진은 좋지 않았다. 한 달 전쯤인 11월15일 출항했으나 바로 풍랑을 만나 회항해 수리를 마치고 다시금 바다로 나온 터. 선단은 남미 대륙으로 향했다. 선단의 원정 목적은 세 가지. 스페인의 영향권에 있는 원주민과 교역 가능성을 타진하고 스페인 보물선을 탈취하며 가능하다면 태평양 어디엔가 존재하는 미지의 대륙을 탐험하라는 임무를 받았다. 드레이크는 특별히 여왕에게서 스페인 선박을 공격해 개인의 이익을 취해도 좋다는 허락까지 얻어냈다. 해가 바뀌어 브라질 해안에 도착한 선단은 1년 반 동안 미주 대륙을 샅샅이 훑었다.



기함의 이름을 펠리칸호에서 골든 하인드호로 바꾸고 캐나다 서부 해안까지 탐험하던 드레이크 선단은 1579년 봄 칠레 해역에서 돈벼락을 맞았다. 스페인 보물선 ‘카카푸에고’호를 나포해 은 26톤과 온갖 보물을 빼앗았다. 옮기는 데 꼬박 나흘이 걸렸다. 분노한 스페인은 드레이크 선단을 잡기 위한 함대를 대서양에 깔았다. 스페인의 추적을 피하기 위한 드레이크의 선택은 서진. 태평양을 항진해 인도양과 희망봉을 돌아 대서양을 북상해 1580년 9월에 영국에 돌아왔다. 선원은 59명밖에 남지 않고 배도 골든 하인드호만 생환했어도 영국이 들썩였다.

두 가지 이유에서다. 막대한 보물과 완전한 세계 일주. 마젤란 이후 58년 만의 두 번째 세계 일주 항해이자 선장이 살아서 돌아온 첫 번째 기록(마젤란은 항해 도중 사망)을 세웠다. 세계 최강국 스페인은 드레이크를 처형하거나 압송하라고 영국을 윽박질렀지만 엘리자베스 여왕은 오히려 골든 하인드호를 방문해 드레이크에게 기사 작위를 내렸다. 드레이크는 해군 부사령관에 임명돼 스페인 무적함대의 침공(1588)을 물리치는 데도 공을 세웠다. 드레이크 같은 인물이 우리 사회에서도 가능할까. 언감생심이다. 강대국의 압력을 능히 물리칠 지도자도 기대하기 어렵거니와 평민에 해적 출신의 요직 중용을 사회가 수용할 수도 없었을 테니.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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