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책꽂이 한쪽에는 사서 피규어가 하나 서 있다. 20~30년 전 미국의 어느 공공도서관 기념품점에서 샀던 것 같다. 유행에 한참 뒤처진 빨간 투피스에 까만 뿔테안경을 끼고 머리를 틀어올린 그녀는 책을 잔뜩 쌓아놓은 북 트럭 옆에 서서 손가락을 입에 대고 나를 바라보고 있다. ‘쉿, 조용히 하세요!’ 인터넷을 검색해보면 ‘쉿!!!’이라는 글씨를 새긴 머그컵을 들고 있는 사서 피규어도 볼 수 있다. 가끔 슈퍼맨 망토를 휘날리는 용맹스러운 사서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사서 피규어는 대부분 이런 모습이다. 도서관은 조용히 독서하는 곳이고 사서는 책 지킴이라는 정형화된 이미지는 동서양을 불문하고 비슷한 모양이다.
그러나 이미지는 이미지일 뿐 요즘 도서관과 사서들의 실제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뉴욕 라이브러리’는 2017년 미국에서 제작돼 이듬해 국내에서도 상영된 다큐멘터리 영화다. 해설이나 의도적 인터뷰 없이 인물이나 사건을 그대로 찍는 것으로 유명한 프레더릭 와이즈먼 감독의 작품답게 90여개에 이르는 뉴욕시 공공도서관에서 벌어지는 일상 모습을 3시간 넘게 보여준다. 이 영화 앞부분에 리처드 도킨스가 나온다. ‘이기적 유전자’의 저자인 그가 도서관 로비에서 대담을 나누는데 수많은 시민이 그 앞에 마련된 의자에 앉거나 지나가던 발걸음을 잠시 멈추고 귀를 기울이고 있다.
또 다른 도서관에서는 미국 노예제에 대한 교과서 왜곡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열띤 토론이 한창이다. 그런가 하면 평범한 동네주민이 다른 주민들 앞에서 악기를 연주하고,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이 열심히 댄스 수업을 하며 즐거워한다. 꼬마들은 사서들이 들려주는 구연동화에 빠져들기도 하고, 학교를 마친 초등학생들은 삼삼오오 모여앉아 이야기를 나누며 숙제도 한다. 도서관은 적막이 흐르는 책의 무덤이 아니라 다양한 방식으로 사람들이 소통하는 곳임을 알려준다.
혹시 도서관이라고 하면 칸막이로 삼면을 막아놓은 책상 앞에서 기출문제의 정답을 달달 외우거나, 옆 사람이 책장을 넘기는 소리에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공간이 떠오르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너무나 오랫동안 도서관에 가지 않았다. 앞에서 설명한 영화 속 장면은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 가까운 공공도서관에 들러보라. 도서관 한쪽을 차지하는 카페에서 잡지나 책을 뒤적이며 따뜻한 차를 마실 수 있다. 때를 놓쳐 못 봤던 영화를 볼 수도, 좋아하는 음악을 들을 수도 있다. 때마침 열리는 강연회에서 재미나고 유익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읽고 싶은 책을 몇 권 빌려 나올 수 있는 것은 기본이다. 가까이에 그런 도서관이 없다고. 그럼 당장 구청장이나 시장, 의회 의원에게 항의 전화하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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