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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울의 언어정담] 누군가의 소중한 일기를 읽는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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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사람의 일기를 읽으면 그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하는 것이 되지만, 죽은 사람이 남긴 일기가 공식 출판된 경우에는 한 개인의 비밀스러운 역사를 탐사하는 감성의 모험이 된다. 위대한 작가들의 명작도 좋지만, 그들의 소소한 일상과 정리되지 않은 날것의 사유가 담긴 일기를 읽는 기쁨도 크다. 요새 나는 ‘소로우의 일기’를 읽으며 ‘월든’을 뛰어넘는 감동을 맛보고 있다. ‘월든’이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창조해낸 기념비적인 ‘텍스트’라면 일기는 소로라는 한 인간이 어떤 과정과 맥락을 거쳐 ‘월든’을 만들어냈는지, 그 숨어있는 ‘컨텍스트(context)’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소로의 일기에는 17세 소녀 엘런 시월을 향한 사랑에 빠져 “사랑에는 오직 한층 더 사랑하는 것밖에는 아무 약도 없다”고 고백했던 청년 소로의 풋풋한 감정은 물론, 사랑하는 형 존과 함께 콩코드와 메리맥강으로 떠난 보트 여행의 흥미진진한 모험도 담겨 있다.

소로의 일기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대목 중 하나는 인디언을 향한 무한한 경의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땅과 생명과 문화를 짓밟고 세워진 미국문명에 대한 비판적 사유가 일기 속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인디언이 자연을 바라보는 방식, 이름을 붙이는 방식에서 소로는 경이와 찬탄을 느낀다. 동물은 물론 식물과도 교감하려 노력하는 인디언들과 달리, 문명인들은 연구라는 명목으로 걸핏하면 동물을 산 채로 가죽을 벗긴다는 것이다. 차가운 언어로 살아있는 존재를 분석하고 해부하는 문명인의 언어와 달리, 인디언의 언어는 사물의 본성과 대화하고 교감하는 따스한 감성의 언어다. 예를 들어 영어에서는 ‘지빵나무(arbor-vitae)’라는 한 단어로만 존재하는 나무의 이름이 인디언의 언어에서는 20가지가 넘는 다양한 표현으로 존재한다. 말못하는 식물이나 동물에 대해서도 끝없이 다정하게 이름을 붙여주던 인디언의 사유. 그것은 자신의 키를 낮추어 자신보다 작은 존재의 눈높이에서 세상을 바라볼 줄 아는 따스함이며, 내 눈에는 보이지 않는 사각지대에 존재하는 타인의 마음을 보살필 줄 아는 애틋함이다.



동물들은 인간보다 고통을 덜 느낀다고 주장하며, 잔인한 동물실험과 가혹한 동물학대를 일삼는 현대인들을 봤다면 소로는 눈물을 철철 흘렸을 것이다. 소로의 사유는 위대한 아메리카 문명을 찬양하는 데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본래 아메리카대륙에서 자연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살았던 인디언에 대한 깊은 연대감에서 시작된다. 인디언의 언어를 통해 세계를 바라본다는 것은 소로에게 새로운 세계를 향한 눈뜸이었다. 소로는 인디언의 언어가 지닌 아름다움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인디언이 지닌 사유의 풍요로움을 본다. 그는 시를 읽을 줄만 알고 시를 생산할 줄 모르는 문명인의 수동성을 뛰어넘어, 누구든 자연에서 영감을 받아 시를 지을 수 있는 열정을 되찾기를 바라는 것이다. 소로는 소유와 착취와 축적을 멀리하고, 자유와 창조와 희열을 추구하는 삶을 꿈꾸었다. 공포와 불안과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이 진정한 기쁨의 시작임을, 그는 알고 있었다.

“우리는 오직 우리가 소유한 만큼만 본다.” 소로의 이런 문장을 읽는 순간, 뼈아픈 자각이 밀려든다. 내가 소유하는 것들이 나의 시야를 제한하고 있다는 것, 소유를 향한 갈망이 더 넓고 더 깊게 볼 수 있는 가능성을 좀먹고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아직 취직도 하지 못한 청년들이 벌써부터 집 살 걱정, 부동산 투자 걱정을 하는 각박한 시대에, 우리가 소유한 것들이 우리를 찌르는 부메랑이 되기 전에, 나는 소로에게서 더 많이, 더 깊이 배우고 싶다. 소로의 일기에는 인간들끼리 나눈 대화보다도 ‘자연과 나’ 단둘이 나눈 이야기가 더욱 소중하게 다뤄진다. 더 많이 성취하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은 느낌, 더 많이 욕심부리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은 이 편안한 느낌이 참으로 좋다. 우리의 소유물이 우리를 짓누르는 삶이 아니라, 꾸밈없고 생동감 넘치는 삶이 내게로 좀 더 가까이 다가오는 듯한 이 느낌이 싱그럽다. 소로의 일기를 읽으면, 박물관의 명화처럼 저 멀리서 반짝거리기만 하던 풍경으로서의 자연이 이제 내 눈앞에서, 내 손바닥 안에서, ‘이용의 대상’이 아닌 ‘우정과 사랑의 대상’으로 다시 태어남을 느낀다. 소로의 일기를 읽고 있으면 온갖 욕심의 안개로 뿌옇게 얼룩진 마음의 창이 투명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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