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말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표류하는 조선이 하도 딱해 당시 주일본 청나라공사관 참찬관이었던 황쭌셴은 ‘사의 조선책략’, 즉 사견이라는 전제하에 조선 외교정책의 방향을 당시 수신사로 일본을 방문한 김홍집에게 건네준다. 그 내용 중에서 황쭌셴은 당시 조선을 ‘연작처당’이라고 평가한다. 이는 중국 전국시대의 고사로 ‘깃들여 사는 집이 불타고 있는데도 불구경으로 즐거운 제비와 참새’처럼 망국의 위험을 망각한 채 안일에 젖어 있는 국가와 국민을 지칭한다.
현 정부 인사들은 현재와 구한말을 비교하는 것 자체를 불쾌하다 할 것이다. 당시 조선은 세계에서 가장 고립 및 저발전된 상태였지만 지금 한국은 주요20개국(G20)에 속한 선진국이고 충분한 자주국방력을 갖췄으며 한미동맹까지 구비돼 안보 걱정이 없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필자의 뇌리에 연작처당의 우려가 계속 맴도는 것을 어쩌랴. 국력은 다소 커졌으나 주변국 모두가 강대국이라 상대적으로 취약하고 분명한 외교정책 없이 표류하는 것도 동일하며, 정치지도자들이 국가의 미래나 안전보다는 권력다툼에 몰두하는 것도 같아 보인다.
현재 미국과 중국은 ‘인도태평양전략’과 ‘일대일로’로 대결하는 가운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 대한 책임론과 홍콩 보안법 문제로 대결의 길로 접어들고 있고 우리 안보의 불확실성은 무척 커졌다. 그러나 현 정부는 상황이 심각하다고 생각하지 않은 채 ‘균형외교’라는 막연한 개념으로 방관하고 있다. 그로 인해 피아 구분이 애매해졌다. 미국은 엄청난 방위비 분담을 요구하고 중국은 친중정책을 압박한다. 자유민주주의 이념, 북핵 위협, 미국과의 동맹을 공유하는 일본과의 갈등관계도 악화하고 있을 뿐이다. 구한말과 크게 다른가.
북한의 핵 위협은 현재를 구한말보다 더욱 위태롭게 만들고 있다. 북한은 핵무기를 폐기하기는커녕 증산을 계속하면서 다양한 첨단 단거리미사일을 개발했다. 이제 마음만 먹으면 한국에 핵 공격을 가할 수 있게 됐다. 나아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과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을 개발해 미 본토 공격능력을 과시함으로써 미국에 한국을 포기하라고 협박하려 한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지난 5월24일 당 중앙군사위원회 확대회의를 개최해 ‘핵 억제력 강화’를 결정했고 이 순간 벙커에서 남한 공격계획을 검토하고 있을 수도 있다. 김여정은 독설로 군사합의 폐기를 위협하고 개성의 남북연락사무소도 폐쇄하려 하고 있다. 그런데도 현 정부는 북한의 비핵화 최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북한의 도발 가능성을 우려하는 관리도 없다.
내부는 더더욱 구한말과 유사하다. 국가의 안위나 미래를 걱정하는 정치인 대신 권력쟁취와 포퓰리즘 전문가만 득세하고 있다. 여야 간에는 ‘협치’라는 말이 사라졌고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하며 정치보복이 횡행하고 있다. 현충일에도 국가와 국민의 분열은 멈추지 않았다. 상당수 언론과 지식인들은 홍위병을 자원하여 국민 여론을 왜곡하고 국민들은 가짜뉴스에 빠져들고 있다. 민주주의의 기본요건인 삼권분립이 붕괴하고 있고 공무원들의 사명감은 희박해지고 있다. 군인들마저 국토방어를 위한 사명감 대신 진급에 몰두하고 견적필승의 자세보다는 사고예방에만 신경을 쓰며 훈련보다는 병사들의 복지를 우선시하고 있다. 구한말의 우국지사도, 황쭌셴 같은 지한파 외국인도 없다. 더 위태롭지 않은가.
개인이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게 되듯이 국가가 안보를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 것이다. 구한말의 역사가 그랬지 않은가. 정부에게 부탁드린다. 현 안보상황을 냉정하면서도 종합적으로 평가해보시라. 비핵화의 환상에서 벗어나 핵으로 무장한 북한의 도발 가능성과 예상 형태를 진지하게 분석하고 최악의 상황을 가정한 대비책을 점검하시라. 절박성과 위기의식하에 범정부 차원의 논의를 통해 최선의 외교방략을 정립하고 북한에 대한 철저한 억제 및 방채 방책을 수립하시라. 정치권은 권력다툼에서 벗어나 국가와 국민의 안전부터 챙기시라. 그리하여 21세기 대명천지에 국가의 멸망을 걱정하는 국민이 단 한 사람도 없도록 해주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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