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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전협정 맺은 '이름없는 주막' 판문점…北 '도끼만행' 후 군사분계선 대치 [김정욱의 밀톡]

■ 익숙하지만 잘 몰랐던 판문점 역사 들여다보니

6·25전쟁 정전협정 당시 '널문리' 지역

중공군 위해 한자식 '판문점'으로 표기

남북한 군인 영토 구분없이 근무하다가

1976년 北도발로 미군 숨지자 일촉즉발

남북정상회담 후 9·19합의로 다시 비무장

분단·대립 속 '평화와 희망' 공존의 장으로

판문점 남측에서 바라본 북측 판문각. /서울경제 DB




올해는 6·25전쟁 발발 70주년이자 정전협정 체결 67주년이 되는 해이다. 동족상잔의 한반도 비극은 이처럼 오래전에 발생한 역사적 사건이어서 지금 젊은 세대들에게 전쟁이라는 것 자체가 크게 와닿지 않는 게 현실이다.

하지만 일부 세대가 전쟁을 경험하지는 못했어도 분단이라는 현실만은 모든 세대가 느끼고 있다. 그리고 그 상징이 바로 비무장지대(DMZ)에 위치한 판문점(JSA·공동경비구역)이다.

남북이 가장 가까운 곳에서 마주하면서 대치하는 판문점은 ‘분단의 현실’과 ‘대립의 상황’, 그리고 ‘평화의 희망’이 공존하는 역설적인 공간이다. 판문점의 행정구역상 주소를 보면 남한은 ‘경기도 파주시 진서면 선적리’이고, 북한은 ‘개성특별시 판문구역 판문점리’다.

판문점이 있는 지역은 6·25전쟁 전까지만 해도 허허벌판에 초가집 몇 채가 있는 이름 없는 시골에 불과했다. 1951년 10월25일 이곳에서 제27차 정전회담(제1~26차 정전회담은 북한 개성에서 열림)이 열리게 되자 국내외의 주목을 받았다.

1953년 7월27일 정전협정이 이곳에서 체결되면서 유엔군과 북한군의 공동경비구역으로 결정됐다. 같은 해 8~9월에는 포로 교환도 여기에서 이뤄졌다.

판문점에는 군사정전위원회 본회의장을 비롯해 유엔 측의 ‘자유의 집’, 북한 측의 ‘판문각’ 등 10여채의 건물이 있다.

2018년 4월 남북정상회담이 열리기도 했던 판문점은 영화·드라마의 소재로 자주 쓰이고 뉴스에도 자주 등장해 우리 국민들에게 어느 정도 친숙한 느낌도 있을 정도다. 우리에게 익숙한 판문점이지만 이곳을 속속 들여다보면 우리가 몰랐던 흥미로운 이야기 등 여러 면모가 있다.

JSA는 한미 장병들이 함께 주둔하며 공동임무를 수행한다는 게 특징이다. 판문점의 ‘군사정전위원회본부구역(MACHA)’에서는 미군이 담당하는 ‘유엔사경비대대’와 한국군이 담당하는 ‘JSA경비대대’가 연합부대 형태로 임무를 함께 수행한다.

실제 경비임무는 한국군의 JSA경비대대가 맡고, 유엔사경비대대는 JSA경비대대의 작전통제를 하는 체제다. JSA경비대대장은 유엔사경비대대의 부대대장을 겸한다.

판문점 군사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경비를 서고 있는 남북 군인들. /서울경제 DB


우리 군의 최전방 감시초소(GP)는 판문점에 있다. 군사분계선에서 불과 15m 떨어진 ‘오울렛 소초(OP.O)’라고 불리는 곳이 바로 최전방 GP다. OP.O는 군사정전위원회본부 ‘갑’ 구역에서 가장 높은 고지에 있으며, 개성공단과 송악산까지 육안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판문점이라는 이름은 어떻게 붙여졌을까. 이에 대해 국방부 관계자는 “판문점 일대는 조선 시대에 ‘널문리’라고 불렸는데 임진왜란 때 피란 가던 선조 임금 일행이 다리가 없어 강을 못 건너자 마을 백성들이 집의 대문(널문)으로 임시다리를 만들어준 것에서 유래했다”며 “6·25전쟁 막바지 정전협정 당시 널문리에는 이름없는 주막이 있었는데 중공군(중국군) 측이 행사 장소를 잘 찾을 수 있도록 ‘널문리’의 한자식 표기를 내건 게 ‘판문점(板門店)’이었다”고 설명했다.

JSA에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 이름의 시설들이 많다. 대표적인 게 한미 장병이 주둔하는 ‘캠프 보니파스’와 한국군이 주둔하는 ‘BRF 소초’다.



이 시설들의 이름이 지어진 것은 1976년 8월18일 북한군이 저지른 도끼만행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날 오전11시께 판문점 내 ‘돌아오지 않는 다리’로 불리는 사천교 인근에서 미루나무 가지치기 작업을 하던 미군 장병 2명을 북한군 수십 명이 도끼 등 흉기를 이용해 살해했다.

북한군에 의해 무참히 죽임을 당한 미군 장교는 아서 조지 보니파스 대위와 마크 토머스 배럿 중위로 도끼만행사건 이후 이들의 이름이 판문점 내 시설에 붙여진 것이다.

캠프 보니파스에는 애초 주한 미군과 중립국 감독위원회의 감시단이 주둔했고, 현재는 한미의 공동 군영이다. 배럿 중위를 추모하기 위해 명명된 BRF(Barrett Readiness Facility) 소초의 한국군은 판문점에서 진행되는 회담이나 송환·안보견학 등의 행사에서 경호 임무를 담당한다.

1976년 도끼만행사건 발생 이전 영토 구분이 없던 판문점에서 남북 군인들이 섞여서 근무를 서며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사진제공=국방부


판문점에는 낮은 높이의 군사분계선(MDL)이 있다. 이 MDL은 원래 없었다가 도끼만행사건을 계기로 생겨났다.

한걸음도 채 되지 않는 이 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남북이 대치 중이다. 정전·분단·대치라는 판문점의 상황을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이 콘크리트 분계선의 높이는 5㎝, 폭은 50㎝에 불과하다.



도끼만행사건이 발생하기 전 JSA는 말 그대로 공동경비구역이었다. 남북 어느 곳의 영토도 아니어서 어느 구역이나 남북 군인들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다. 군사분계선 없이 공동경비를 하다 보니 남북 군인들의 상호교류가 가능했고, 자연스럽게 마주치는 남북 군인들은 기념사진도 함께 찍고는 했다.

1966~1968년 판문점 경비병으로 근무했던 한 JSA 전우회 회원은 “그때는 남북한 군인들이 섞여 근무를 섰기 때문에 벤치에 같이 앉아 휴식을 취하거나 서로 담배도 바꿔 피우고는 했다”며 “당시에는 카메라가 귀해 남북 군인들이 카메라를 소지하지는 못하고 판문점에 취재를 오는 기자들이 함께 있는 남북 경비병들의 모습을 기념사진으로 찍어주고는 했다”고 회상했다.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분위기였던 것이다.

그러나 북한군에 의해 미군 장교가 살해되면서 남북 서로 간의 영역을 나누고 낮은 콘크리트 장벽을 세워 분단의 상징이 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북한군이 판문점 도끼만행사건을 저질렀을 때 이 사건으로 한반도는 일촉즉발의 전쟁위기가 고조되기도 했다.

당시 제럴드 포드 미국 대통령은 사건 발생 직후 북한에 대한 선전포고 격으로 주한미군사령부에 전투준비태세 명령을 내리고 전투기와 핵무기가 탑재된 폭격기 등을 한국에 급파했다. 또 미군의 최강전력으로 꼽히는 항공모함까지 한국에 배치시켰다.

도끼만행사건을 일으킨 북한은 “우리에게는 책임이 없다”며 오만한 태도로 일관했다. 하지만 포드 대통령이 선전포고를 하고 북한에 선제공격을 하려는 징후를 보이자 제2차 한국전쟁 발발 가능성을 인지한 김일성은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고 미국에 사과를 했다.

2018년 4월 27일 판문점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함께 군사분계선을 넘어오고 있다. /서울경제 DB


JSA의 군사분계선이 세워진 계기는 갈등과 대립에 의한 것이었지만 2018년 4월27일 열린 남북정상회담에서는 남북의 두 정상이 이곳에서 악수를 나눴고, 문재인 대통령은 ‘잠시 월북’하는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다. 또 지난해 6월30일 판문점에서 남·미·북 정상들이 회동을 하기도 했다.

판문점 남북정상회담 이후 이곳에는 변화가 일어났다. 바로 남북 경비병력이 비무장으로 근무를 선다는 것이다.

남북 정상이 판문점에서 만난 후 그해 9월 평양에서 재회해 맺은 ‘9·19 군사합의’에 따라 JSA에서 남북은 경비병력을 각각 35명으로 줄이고 모든 화기를 철수하기로 했다.

최근 들어 강원도의 DMZ에서 북한이 총격을 가하는 등 군사합의 일부가 지켜지지 않고 있지만 판문점에서만은 현재도 남북 모두 군사합의를 준수하고 있다.

군 관계자는 “JSA 경비병력은 권총을 비롯한 어떤 화기도 소지하지 않고 근무를 서고 있는 것은 분단의 상징 장소에서 무기가 사라졌음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JSA 경비병력이 비무장으로 근무를 하지만 만약의 상황에 대한 대비는 항상 하고 있다. BRF 소초 인근에서는 기동타격대가 상시출동태세를 유지하면서 빈틈없는 준비를 하고 있다.

JSA경비대대에는 우리 군 유일의 민사작전 전담부대인 민정중대가 있다. 이 중대는 ‘대성동 자유의 마을’ 주민들을 경호하고 지원하는 임무를 수행한다. ‘대성동 자유의 마을’은 한국에서 단 하나뿐인 DMZ 내 민간인 거주 마을이다.

민정중대 장병들은 이 마을 출입자 경호와 주민들의 영농활동 시 근접경호 작전을 수행한다. 또 주민들의 생활에 필요한 민사업무와 구제사업 등도 지원한다.

대성동 자유의 마을은 정전협정에 따라 생겨난 특수한 마을이다. 정전협정에는 ‘남북이 DMZ에 각각 마을을 하나씩 유지할 수 있다’는 조항이 있다. 이에 따라 북한에는 DMZ 민간인 거주지인 ‘기정동 마을’이 있다. 대성동 마을은 군사분계선과 불과 400m, 북한 기정동 마을과는 800m 거리에 있다.

2000년대 초반 JSA에서 군 복무를 했던 서영민(43·회사원)씨는 “판문점은 그 어느 전방지역보다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지만 이 때문에 평화가 유지되는 곳”이라며 “나중에 통일이 된다면 북한의 판문점 군 복무 출신들과 함께 ‘추억의 JSA 전우회’ 같은 것을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고 말했다.
/김정욱기자 mykj@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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