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오는 11월3일(현지시간) 대선 결과에 대한 ‘불복 가능성’을 시사하면서 드리운 정치적 불확실성이 금융시장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민주당 대선후보가 서로 승자라고 주장하는 상황이 벌어질 경우 미국 금융시장은 크게 요동칠 수밖에 없다. 글로벌 시장에서는 대선 전후의 주가 급락에 대비하는 투자자가 늘어나는가 하면 월가에서는 금 등 안전자산 선호 현상이 벌써부터 나타나고 있다.
28일(현지시간) 월스트리트저널(WSJ) 등 미국 언론에 따르면 시장 일각에서는 ‘공포지수’로 불리는 변동성지수(VIX)에 투자해 주가 급락에 대비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정치적 불안정이 금융시장을 흔드는 위험을 미리 헤지하겠다는 것이다. 시카고옵션거래소(CBOE)에서 거래되는 VIX는 올 10월물의 경우 32.23이지만 대선이 치러지는 11월물은 33.68이다. 이후 12월 32.03, 내년 1월 31.03으로 다시 낮아진다. VIX는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500의 향후 30일간 변동성에 대한 기대를 보여주는 지수로 11월물 VIX가 높다는 것은 주가 하락을 예상하는 투자자가 많다는 의미다. WSJ는 “시장이 대선의 혼란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얘기”라고 진단했다.
대표적 안전자산인 금값의 흐름도 마찬가지다. 금 선물 가격은 온스당 10월물 1,876.70달러, 11월물 1,881.30달러, 12월물 1,886.40달러, 내년 1월물 1,893.90달러로 계속 상승하고 있다. 급값은 올 들어 23% 올랐는데 추가 상승을 예측하는 투자자가 많다는 것은 역시 리스크를 회피하려는 심리가 반영된 결과다.
월가와 글로벌 투자가들은 조지 W 부시 공화당 후보와 앨 고어 민주당 후보가 맞붙었던 지난 2000년의 데자뷔 현상을 우려한다. 고어가 패배를 인정하기까지 6주 동안 S&P지수는 무려 12%나 폭락했고 금값은 폭등했다. 당시 고어는 5,100만표(48.4%)를 얻어 부시에게 약 50만표(0.5%) 정도 앞섰지만 선거인단 숫자에서 271대267로 졌다. 그런데 플로리다의 민주당 우세지역에서 이해할 수 없는 무효표가 대거 나온 것이 드러나 재검표에 들어갔지만 결국 대법원은 재검표 중단을 명령하고 부시의 손을 들어줬다.
금융시장에서는 이번 대선에서도 비슷한 일이 충분히 일어날 수 있다고 내다본다. 가장 우려하는 시나리오는 대선 당일에는 트럼프 대통령이 이기지만 우편투표 개표를 완료한 뒤 합산 스코어에서는 바이든이 승리하는 상황이다. 각종 여론조사에 따르면 트럼프 지지자들은 우편투표를 좋아하지 않지만 민주당 지지자들은 우편투표에 대한 의향이 상당히 높았다.
그렇기 때문에 트럼프 대통령은 우편투표가 재앙이라며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을 거듭 밝혔고 23일에는 “11월 대선은 결국 연방대법원에서 끝날 것”이라며 불복의 복선을 깔아놓은 상태다. 대통령 자리를 두고 정쟁이 벌어질 경우 금융시장의 변동성은 극에 달할 수 있다. 뉴욕타임스(NYT)는 “11월 대선에서 하나의 플로리다가 아니라 수십개의 플로리다가 나타난다고 상상해보라”며 “개표부정 문제를 둘러싼 소송이 엄청나게 쏟아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여기에 민주당이 발의한 2조4,000억달러 규모의 신규 부양책이 불발될 경우 변동성은 더 커질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시타델증권의 글로벌 투자수석인 마이크 드패스는 “이번 대선일 전후의 변동성이 역대 최고치로 치솟을 것을 염두에 두고 투자전략을 짜고 있다”고 말했다. 알리안츠글로벌인베스터스의 모나 마하얀 선임투자전략가는 “선거 기간에 더욱 방어적인 입장을 취할 것”이라고 밝혔다. 투자은행 골드만삭스는 지난달 대선 불복 가능성에 따른 시장의 변동성 위험을 헤지하기 위해 12월 만기 상품을 늘리고 있다는 고객 통지문을 발송했다. 월가 투자사인 스파이더록투자자문은 S&P500지수가 내년 초까지 25% 하락할 경우 수익을 내는 옵션 상품을 내놓았다.
다만 이 와중에 미국 증시를 이끌고 있는 테크 주식은 정치적 불확실성 속에서도 실적을 기반으로 한 강세가 이어질 것이라는 예상이 우세하다. 애플을 필두로 아마존·마이크로소프트·알파벳·페이스북·넷플릭스 등은 증시의 기술 테마와 비대면 트렌드에 올라탄 상태라 기세가 쉽게 꺾이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테슬라 역시 22일 배터리데이의 실망을 딛고 주가가 좋은 흐름으로 반전됐다. 증시 강세론자로 꼽히는 제러미 시걸 펜실베이니아대 교수는 누가 대선에서 승자가 되든 내년 증시는 강세장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시걸 교수는 CNBC 인터뷰에서 “최근의 유동성 분출은 2차 세계대전 이래 75년간 전례가 없었던 것”이라며 “내년에 백신이 나오고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유행의 공포가 사그라지면 큰 급등세가 나타날 것“이라고 말했다.
/맹준호기자 next@sedaily.com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