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최근 서훈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의 미국 방문 사실을 맹비난했다. 남북관계를 미국을 통해 해결하려는 정부의 노력을 극도로 꺼리는 듯한 자세를 취했다.
조선중앙통신은 29일 ‘동서남북도 모르고 돌아치다가는 한치의 앞길도 없다는 것을 명심하여야 한다’는 제목의 기사에서 “남조선의 청와대 국가안보실실장이란 자가 비밀리에 미국을 행각하여 구접스럽게 놀아댔다”고 비난했다. 통신은 특히 서 실장이 미국 방문 관련 기자회견에서 한 “남북관계는 단순히 남북만의 관계라고 할 수 없다. 남북관계는 미국 등 주변국들과 서로 의논하고 협의해서 풀어야 할 문제”라고 한 발언을 꼬집으며 “얼빠진 나발” “신성한 북남관계를 국제관계의 종속물로 격하시킨 망언” “민족자주를 근본 핵으로 명시한 역사적인 6·15공동선언과 10·4선언, 판문점 선언과 9월 평양공동선언에 대한 남조선 당국의 공공연한 부정이고 배신”이라고 비판했다.
통신은 이어 “북남관계는 말 그대로 북과 남 사이에 풀어야 할 우리 민족 내부 문제”이며 “외세에 빌붙거나 다른 나라 그 누구와 논의하고 도움을 받아야 할 문제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또 “북남관계 문제에 수십 년 동안이나 몸담아왔다고 자부하는 사람이 모든 문제를 푸는 근본 열쇠가 우리 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가는 데 있다는 것을 모른단 말인가”라며 “오늘 북남관계가 교착상태에 놓인 원인이 남한 당국이 스스로 미국에 제 발을 얽어매 놓고 자기를 조종해달라고 제 운명의 고삐를 맡겨버린 데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그런데도 아직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북남관계를 망쳐놓은 장본인에게 도와달라고 청탁하는 것은 집안 가산을 풍비박산 낸 강도에게 수습해달라고 손을 내미는 격”이라고 주장했다.
북한이 청와대 핵심 인사인 서 실장을 직접 겨냥해 비난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다만 노동신문 등 북한 주민들이 모두 보는 매체가 아니라 대외용인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비난했다는 점에서 수위는 조절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임을출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조선중앙통신 기사는 남북관계에 있어 대미 자율성 확보를 요구해온 북한의 기존 주장을 되풀이한 것이지만 그동안 자제해오다가 오늘 다소 수위가 높은 대남 비난을 재개한 것은 코앞에 닥친 미국 대선 이후를 대비해 우리 정부의 향후 대미 정책 방향에 영향력을 미치려는 의도로 풀이된다”며 “사실상 대북 접촉과 대화의 핵심 당사자인 서훈 국가안보실 실장을 겨냥해 노골적인 비난과 경고를 보낸 것은 미 대선 이후 들어설 신정부(트럼프 재선 포함)에 대해 당당하게 처신해 남북관계의 자율성을 확보하지 않는 한 남북관계 복원은 기대하지 말라는 명확한 메시지를 보낸 것이라 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 교수는 “향후 우리 측이 중재자를 자처하면서 미국을 설득하지 못하고 외세에 굴종적인 태도를 보일 것에 대한 우려를 미리 표출한 것으로 보인다”며 “실명 비난은 자제해 수위를 조절했으나 이번 발표가 비난전의 신호탄인 될 지는 좀 더 지켜볼 필요가 있다”고 진단했다.
서 실장은 지난 13∼16일 미국을 방문해 카운터파트인 로버트 오브라이언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과 면담하고 한반도 문제 등을 논의했다.
/윤경환기자 ykh22@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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