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업해 다음달 사무실을 여는 박모(48)씨는 강남 지역 당근마켓의 무료나눔을 통해 지난해 폐업으로 사무실 집기를 급히 처분하는 이웃 주민에게서 책상과 의자, 식기류 등을 얻었다. 생애 첫 중고 거래를 맛본 박씨는 내친 김에 2년 간 사용하던 에어팟을 중고나라에서 70% 할인된 가격에 처분하고 여기서 미개봉 에어팟 프로 3세대를 정가 대비 85% 가격에 구입했다. 그는 “합리적인 소비를 했다는 만족감에 스스로를 칭찬 했다”고 전했다.
이제 중고는 더 이상 ‘남이 쓰던’ 상품이 아니다. 나에게 오면 그 상품이 몇 번의 손바뀜이 있었던지 간에 ‘신상’이다. ‘N차 신상’이 생산과 소비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꾸고 있는 배경이다. 이로써 중고거래가 ‘1차 신상’을 다루는 유통시장의 메인 플레이어들까지 위협하는 모습이다. 중고거래의 이유는 단순히 ‘지갑이 얇아서’ 만이 아니다. 중고거래 플랫폼이 MZ세대는 물론 고연령층에게도 재테크의 재미가 쏠쏠한 ‘새로운 놀이터’일 뿐 아니라 거래 과정에서 ‘친구 맺음’과 같은 소셜 라이프도 형성시킨다. 중고거래가 ‘쇼핑’을 뛰어 넘어 새로운 문화를 구축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1차 신상’ 위협하는 ‘N차 신상’=이미 ‘왝 더 독(Wag The Dog·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현상)’은 일어나고 있다. 일반적으로 기업들은 그간 차별화된 디자인이나 기능, 품질 등을 앞세워 ‘1차 신상품’들을 선보이며 시장을 주도해 왔다. 특히 빠르게 IT 신상을 빠르게 받아 들이는 소비자들은 ‘얼리 어답터’나 ‘이노베이터’로 분류되며 신문물에 깨어있는 이들처럼 여겨지곤 했다. 그러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을 지렛대로 중고거래를 통해 스마트한 소비를 즐기는 ‘세컨슈머’들이 세력을 키우며 유통 시장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모양새다. 구입하는 순간 바로 중고가 되어 버리는 신상의 약점을 파악한 세컨슈머들은 중고거래 사이트를 뒤지며 이미 누군가의 손을 타며 감가상각된 ‘언박싱’ 신제품을 합리적인 가격에 취한다. 예컨대 백화점이나 가전제품 전문점에서 다이슨 헤어드라이기를 꼼꼼히 살펴본 후 집에 돌아와 옥션이나 G마켓, 쿠팡 같은 오픈마켓을 뒤지는 것이 아니라 중고거래 사이트에 들어가 할인률이 더 높은 언박싱 새 상품을 고르는 식이다.
신상품을 만들었지만 팔리지 않아 재고로 쌓이고 이 또한 결국 ‘1차 중고’가 되어 버리면서 코로나 경기 불황 늪에 빠져 버린 기업들은 진퇴양난에 처했다. 한 K 패션 브랜드 디자이너는 “시즌별 신상을 많이 만드는 대신 수요를 계산해 최소한의 기획 상품만 제작해 재고를 줄이는 데 주력하고 있다”며 “특히 옷이 지구를 해치는 주범으로 인식되어 중고 빈티지 옷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높아 갈수록 힘들다”고 털어놨다.
이처럼 1차 신상을 만들어내는 ‘1부 리그’에 속한 기업들은 이제 ‘2부 리그(중고거래 시장)’의 위협을 받자 전략을 수정하기 시작했다. 신생 스타트업인 공유옷장 플랫폼인 ‘클로젯셰어’에는 100여개의 K패션 브랜드와 100여개의 글로벌 패션 브랜드가 직접 입점을 요청해 와 둥지를 틀었다. 일반인들이 자신의 옷장을 공유해 옷과 가방 등을 렌탈해주는 서비스인데 신생 디자이너 브랜드는 물론 모피 브랜드와 루이까또즈 등의 신상품들이 들어왔다. 지난달에는 14톤 트럭이 1만벌의 신상 의류를 클로젯셰어의 광주 물류센터로 싣고 왔다.
리바이스는 세컨드 핸드 온라인 스토어를 오픈했고 패스트패션의 대명사 H&M도 중고 온라인 사이트를 열었다. 국내에서 해외 직구도 가능한 세계 최대 중고 명품 거래 온라인 플랫폼 ‘더리얼리얼’에는 구찌, 버버리, 스텔라 매카트니 등의 굵직한 브랜드들이 직접 입점해 자신들의 중고 제품을 판다.
자체 중고거래 플랫폼이 없는 롯데마트와 AK플라자, 이마트 등은 주요 매장에 중고거래 자판기 ‘파라바라’를 설치함으로써 고객들의 매장 방문을 유인한다.롯데쇼핑은 한정판 스니커즈 오프라인 거래소 ‘아웃오브스탁’과 제휴를 맺고 패션 전문몰 무신사도 리셀 플랫폼 ‘솔드아웃’ 온·오프라인 매장을 열었다.SK네트웍스와 홈플러스도 의기투합해 중고폰 매입 서비스 ‘민팃’을 전국 홈플러스 매장 140여 곳에 입점시켜 운영하고 있다. CU와 리폰의 중고폰 사업 ‘리폰’은 1만4,000여 개에 이르는 CU 점포의 접근성을 강점으로 내세웠다.
◇10대 소녀의 ‘의식있는 쇼핑’부터 70대 시니어의 ‘친구 만들기’=“신상을 사고 버리는 반복 행위 대신 제품의 수명이 다할 때까지 쓰는 것 만으로도 지구를 구하는 길이구나 알게 되었어요. 당근마켓하는 친구들과 ‘삼당근’ ‘사당근’을 외치는 것도 재밌고요, 번개장터에서 ‘번개톡’으로 모르는 친구랑 말 트고 대화하기도 해요(15세 박모양).”
“저는 스니커즈의 리셀로 매달 30만~50만원씩 용돈을 벌고 있습니다. 요즘에는 워낙 경쟁이 치열해서 ‘선착순’ 대신 ‘래플(추첨제)’ 방식이 많은데 래플로 당첨된 친구가 한 턱 쏘기도 하고요(연세대 3학년 장모씨).”
중고거래 시장은 이 시대를 관통하는 수많은 트렌드와 키워드의 축소판이다. 필환경, 미닝 아웃, 불황, 취향 소비, 리셀, 미니멀리즘, 펜데믹, 덕질, 한정판, 가치소비, 가심비, 가성비, 레트로, 재테크, 로컬 등이 한 데 모여 있다.
특히 쇼핑은 도박과 비슷한 도파민이 분비된다. 중고거래가 묘한 중독성을 가져오는 이유다. 서용구 숙명여대 경영학과 교수는 “집안에 갇혀 있다 보니 계속 내다 팔 물건이 보인다. 대중들은 중고거래로 3만, 5만원 버는 재미를 통해 일종의 성취감과 중독성을 맛본다. 중고거래를 안 한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거래한 사람은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라고 말했다.
최근 여유있는 소비자들도 중고 시장에서 명품을 쉽게 산다. 패션테크(패션+테크)도 될 뿐더러 오히려 다양한 제품을 향유할 수 있어서다. 최근 롯데백화점 본점 인근의 중고명품 매장 ‘구구스’에서 까르띠에 중고 시계를 신제품 대비 70% 할인된 350만원에 구입했다는 서울 소재 대학의 한 교수는 “중고 제품은 지각있고 지속가능한 소비를 실현시켜주기 때문에 만족감이 높다”며 “환경친화적인 성향인 밀레니얼 세대들은 이 같은 이유로 가장 부유한 세대임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으로 중고를 선택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동네 사랑방과 마을회관’을 자처하며 지역 커뮤니티 서비스로 급성장한 당근마켓은 중고거래를 ‘문화 및 취미 생활’로 한 차원 높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 70대 남성은 같은 지역 이웃과의 온라인 소통 마당인 ‘동네생활’ 서비스를 통해 비슷한 연령대 여자 친구를 만나게 됐다고 고백하기도 한다. 각박한 비대면 일상 속에서 따뜻한 ‘관계맺음’의 문화가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트렌드 코리아’의 대표저자 김난도 서울대 교수는 “당근마켓의 성장은 단순 중고거래 서비스를 넘어 취향 공동체에 소속감을 느끼는 대중의 심리를 잘 적중했다”고 분석했다.
중고거래 산업 성장의 관건은 갈수록 깊어지는 비대면 경제 속에서 불신의 해소와 신뢰감 장착이다. 번개장터는 중고거래 플랫폼으로는 최초로 전문 데이터 인텔리전스 보안 기업인 S2W LAB(에스투더블유랩)과 협력해 사기 거래 탐지 활동을 강화했다. 지난달 초에는 상품만 준비되면 택배기사가 정해진 시간에 픽업하고 포장해 안전하게 배송까지 해주는 ‘번개장터 택배 서비스’를 서초·강남·송파 지역에서 먼저 론칭했다. 중고나라 관계자는 “국내 중고거래 이용자의 최대 관심사는 ‘안전한 거래’ 방법을 이용하는 것”이라며 “직거래의 한계점이 문제제기 되며 각 플랫폼마다 ‘안전한 거래’ 관련 기술을 개발하고 있으며 이는 시장 활성화의 계기가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심희정 라이프스타일 전문기자 yvette@sedaily.com
/박태준 june@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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