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러너’(Showrunner), 드라마 대본을 쓰는 책임 작가이면서 전체적 방향설정을 비롯한 스태프와 배우의 캐스팅 등 제작 전반에 관여하는 총책임자다. 미드(미국 드라마)의 제작 시스템을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용어지만 한국에서는 생소하다. 작가가 드라마 제작의 총책임을 지는 시스템이 갖춰지지 않았다보니 비슷한 역할을 하는 직책의 개념이 없기 때문이다. 미국서 ‘드라마는 작가의 예술’이란 점이 확고한 반면 한국에선 대본 집필에도 시간이 모자란 탓이 크다. 한국에서도 현재 시스템의 개선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많다.
한국콘텐츠진흥원 주최로 8일 서울 상암동 YTN홀에서 이틀째 일정을 진행한 국제방송영상마켓(BCWW) 2021 콘퍼런스에서는 대담 ‘한국과 미국의 작가(쇼러너)가 말하는 드라마 시리즈를 만드는 법’이 열렸다. 시작은 한국의 드라마 제작 시스템에 대한 설명이었다. ‘품위있는 그녀’, ‘마인’ 등의 작가이자 제작사 대표이기도 한 백미경 작가는 “제작사를 차린 이유 중엔 작가가 콘텐츠 창작의 콘트롤타워가 돼서 좀 더 양질의 작품을 만들 수 있는 주체이고 싶다는 점도 있었다”고 운을 뗐다. 그는 한국의 드라마 작가들에 대해 “길게는 50부작까지 굉장한 긴 호흡의 작품까지도 혼자 쓰기 때문에 각자의 역량은 매우 향상됐다”며 “반면 대본 작업 외엔 시간이 없어서, 현장을 콘트롤하지 못해 대본이 작가의 의도와 달리 훼손되는 등 문제가 심하다”고 말했다. 당연히 배우 캐스팅에도 관여하지 못하는 작가도 많다고. 그는 “한류 배우가 나오지 않는 서사를 달리는 콘텐츠는 제작비 지원이 많지 않아, 창의적으로 쓰기 힘든 시스템이 있다”고 토로했다.
그럼 미국은 어떨까. 화상으로 참여한 동영상스트리밍서비스(OTT) 애플tv+ 드라마 ‘파친코’의 쇼러너인 허수진 작가는 미국의 쇼러너에 대해 “기업 대표이사 같다”며 “창작자면서 프로듀서 역할도 한다”고 말했다. 대본의 최종 책임자일뿐 아니라 제작에 주어진 예산을 할당·관리하는 권한과 책임도 지고 섭외도 총지휘하며, 편집 등 후반작업도 쇼러너의 몫이다.
그는 미국의 작가실 체계는 스태프라이터부터 막내작가, 프로듀싱 라이터를 거쳐 쇼러너의 지위까지 오르는 식이라고 전했다. 각 스태프마다 에피소드 하나씩 집필을 맡으며, 에피소드 촬영장에도 함께 한다. ‘굿닥터’ 미국판의 프로듀서인 이동훈 엔터미디어픽쳐스 대표도 화상을 통해 “현장에서 배우와의 피드백, 예산 등 문제로 대본을 수정해야 할 땐 작가가 쇼러너와 직접 연락 후 현장에서 고치게 된다. 작가와 연출자가 현장서 유기적으로 작업한다”고 전했다.
유튜브 중계를 통해 대담을 지켜본 시청자들은 작가 지망생들에게 한미 양국의 작가로서 건네고 싶은 조언을 궁금해 했다. 백 작가의 답은 어떻게든 써 보라는 것이었다. 그는 “플랫폼이 늘어남에 따라 신인 작가뿐 아니라 원작 웹툰, 웹소설 등을 드라마화할 이들도 많이 필요로 한다”며 “공모전이든 보조작가든 드라마를 집필하려면 경험이 중요하다. 읽어보고 싶어지는 좋은 콘텐츠가 있다면 기회는 많다”고 말했다. 허 작가는 “지망생들에게 정해진 규칙을 따르지 말라고 조언한다”며 “그저 쓰고 싶은 것, 하고 싶은 이야기를 써야 한다고 말해주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읽어보는 대본마다 시작도 비슷하고 서로 카피하기 바쁘다는 느낌”이라며 “독창적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담에 참여한 세 사람 모두 소수자를 다루는 서사로 주목을 끌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백 작가는 ‘마인’ 등을 통해 여성, 성소수자 이야기를 적극 도입했고, 허 작가의 ‘파친코’는 이민자 이야기다. ‘굿닥터’ 역시 장애를 가진 의사가 주인공이다. 세 사람 모두 이에 대한 강한 자부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 대표는 “한국사람 이야기도 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며 “5년 전이라면 내가 힘을 키워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을 것도 자신 있게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허 작가도 “한국계 등 유색인종과 여성의 경제력이 커졌다. 100년 넘게 이어진 백인 남성이 여성 구하는 똑같은 이야기에 지친 이들이 많다”고 강조했다. 백 작가 역시 “‘힘센여자 도봉순’이 성공한 뒤에도 ‘품위있는 그녀’가 중년 여성 이야기란 이유로 편성되지 못하던 시절도 있었다”며 “최근 한국에도 여성 서사가 많아졌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하다”고 말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