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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친 풍랑 속에서도 '신의 가호'가 있기를

[문화재의 뒤안길]신안선 목제 보살상

신안선에서 출수된 높이 28 '목제 보살상' /사진제공=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조운(漕運)하는 일에 신의 가호가 있음을 알기에 앞길의 바람과 해무는 근심하지 않는다네.”

이 구절은 지금의 전북 익산인 전라도 함열 현감 임교진이 세금으로 거둔 곡식을 배로 운반하던 중 해무를 만나 항해가 불가능 하자 사공의 운에 따라 지은 시의 일부다. 그가 조운 과정을 상세히 기록해 남긴 ‘조행일록(漕行日錄)’에 적혀 있다. 지금처럼 안정적인 육상교통과 항공이 발전하기 이전, 가장 멀리 많은 짐을 나르기에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 수운(水運)과 해운(海運)이었다. 항해·조선기술이 지금 같지 않던 옛날에는 항해 침몰 사고가 많았고 이에 옛사람들은 출항하며 신께 안전을 빌었다.



1323년 중국 닝보(현 경원)에서 출발해 일본 하카타로 향하던 원나라 무역선인 ‘신안선’도 다양한 신의 보살핌을 받으며 망망대해를 항해했다. 이는 수중발굴을 통해 출수된 청백자관음보살상, 목제 보살상 등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관음보살은 중국 동남부지방을 중심으로 ‘남해관음’이라 불리며 파도를 진정시키고 풍랑을 잠재워 항해의 안전을 지켜주는 해신(海神)이 됐다.

신안선에서 출수된 '청백자 관음보살상' /사진제공=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신안선에서 발견된 목제 보살상은 높이 28cm의 작은 크기에 방부·방수 기능을 하도록 옻칠한 것으로 보아 신안선의 선원이 지참한 휴대용 신상(神像)으로 보인다. 목제 보살상을 지참한 선원은 무사귀환을 기원하며, 때때로 파도와 풍랑 앞에서 관세음보살을 외며 자비를 구했을 것이다. 물론 선원이 항해의 안전과 무사귀환을 빌기 위해 지참한 것이 아니라 원래 목적지였던 일본 하카타 항과 교토의 동대사나 신사 등지에 보낼 상품일 가능성도 있다. 전남 신안군에서 난파된 신안선은 신의 가호 아래 일부 복원됐고 출수된 다양한 유물과 함께 현재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에서 만나볼 수 있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목포해양유물전시관 전시교육과 황희정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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