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발언으로 상처받으신 모든 분들께 머리 숙여 사과드립니다”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가 10일 광주 5·18 민주 묘지를 찾아 ‘전두환 옹호 발언’을 사과했다. 윤 후보가 비를 맞으며 머리를 숙인 지점은 5·18민중항쟁추념탑에서 50m 떨어진 곳. 그의 방문을 반대하는 시민 단체와 대학생들에 가로막혀 분향도 못한 채 발길을 돌려야만 했던 반쪽 참배였다. 지난 7월 17일 국민의힘에 입당하기 전 첫 방문 때와 분위기가 정반대로 달라진 것이다.
尹 “5·18 정신은 자유민주주의 정신”
윤 후보는 이날 오후 4시 20분께 광주 북구 국립 5·18민주묘지 앞 민주의 문에 들어섰다. 방명록에 ‘민주와 인권의 오월 정신 반듯이 세우겠습니다’라고 적고 추념탑으로 향했다. 하지만 윤 후보의 방문을 반대하는 시민들, 윤 후보의 지지자들, 취재진과 윤 후보의 경호인력 등 약 300명이 넘는 인원이 뒤엉키며 걸음을 떼기도 쉽지 않았다. 윤 후보가 민주의 문에서 추념탑 앞 50m 지점까지 약 160m를 걷는 데만 17분이 걸렸다.
결국 윤 후보는 시위대와 대치하는 상황에서 추념탑을 향해 머리를 숙이고 묵념했다. 참배단에 닿지 못해 예정됐던 헌화와 분향 모두 취소됐다. 윤 후보는 원고지 2매 분량의 사과문을 꺼내 1분 30초간 읽었다.
윤 후보는 “제 발언으로 상처받으신 모든 분들께 머리 숙여 사과드린다”며 고개를 숙였다. 손팻말을 든 시위대가 “윤석열 나가라”, “쇼 하지마라” 등을 외치자 윤 후보는 더욱 목소리를 높이며 사과를 이어나갔다. 그는 “저는 40여년전 오월의 광주시민들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위해 피와 눈물로 희생하신 것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며 “광주의 아픈 역사가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역사가 됐고, 광주의 피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꽃 피웠다. 이 시대를 사는 우리 모두는 5월 광주의 아들이고 딸”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제가 대통령이 되면 슬프고 쓰라린 역사를 넘어 꿈과 희망이 넘치는 역동적인 광주와 호남을 만들겠다”며 “지켜봐 달라”고 말했다.
윤 후보는 사과를 마치고 기자들과 만나 ‘항의하는 분들이 많다’는 지적에 “그분들의 마음을 십분 이해한다”며 “분향은 못 했지만 사과드리고 참배했던 게 다행이라 생각하고 있다”고 답했다. 그는 “오늘 이 순간 사과드리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상처받으신 국민들, 특히 광주 시민 여러분께 이 마음을 계속 가지고 가겠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5·18 정신이라는 것은 자유민주주의 정신이고, 우리 헌법 가치를 지킨 정신이므로 당연히 개헌 때 헌법 전문에 반드시 올라가야 한다”고 덧붙였다.
김종인 국민의힘 전 비상대책위원장과 같이 ‘무릎 참배’를 하지 않은 데 대해선 “이 마음을 계속 유지해서 가지고 가겠다”고 말을 돌렸다.
與 “시민 상대로 사과 강제 집행” 맹비난
尹지지자 몰려 선거 운동 방불케 하기도
尹지지자 몰려 선거 운동 방불케 하기도
이날 윤 후보의 사과에 대해 여당은 “광주를 또 한 번 정치적으로 고립시키고 이용하겠다는 얄팍한 발상”이라며 맹비난했다. 고용진 민주당 선대위 수석대변인은 논평을 내고 “전두환이 공수부대로 광주를 강제 진압했다면, 윤석열은 억지 사과로 광주시민을 강제 위무하려 한 것”이라며 “광주시민을 대표한 5·18 단체들이 현시점에서 방문 자체를 반대했으나, 압수수색 영장을 집행하듯이 광주시민을 상대로 사과를 강제집행 했다”고 말했다.
고 수석대변인은 “광주 시민 누구도 윤 후보가 진정 어린 사과와 책임 있는 조치를 약속한 뒤 광주를 찾았다면 방문을 반대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일방통행식, 보여주기식 사과이기에 반대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민주당 소속의 김상희 국회부의장도 이날 페이스북에 “오지 말라는 광주시민들의 목소리를 수용하는 것이 진정한 사과의 시작”이라며 “그런데도 굳이 가겠다는 건 결국 봉변당하는 그림을 만들어서 광주를 또 한 번 정치적으로 고립시키고 이용하겠다는 얄팍한 발상이 아닌지 의심스럽다”고 꼬집었다.
‘사과 일정’을 내세웠지만 선거 운동을 방불케 하는 모습도 연출됐다. 이날 윤 후보는 민주묘지 방문에 앞서 5·18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던 고(故) 홍남순 변호사의 전남 화순군 생가와 광주 5·18 자유공원도 방문했다. 곳곳마다 윤 후보 지지자들과 캠프 혹은 당에서 나온 사람들이 윤 후보를 연호하며 응원했다. ‘어대윤(어차피 대통령은 윤석열)’이라고 쓰인 대형 태극기를 들고 나타난 지지자도 있었다.
특히 이날 오후 3시께 육군 상무대 영창 터였던 광주 5·18자유공원에는 국민의힘의 한 당원협의회 소속 인원 30여명을 포함해 지지자들이 100명 이상 모여들었다. 이들은 “청년의힘으로 정권교체”, “호남의힘으로 정권교체”를 외치며 자유공원으로 들어오는 윤 후보를 반겼다. 윤 후보는 자신의 이름을 외치는 지지자들을 향해 화답하진 않고 무거운 표정으로 일정을 수행했다.
앞서 윤 후보는 지난달 19일 부산 해운대에서 당원들을 만난 자리에서 “전두환 대통령이 군사 쿠데타와 5·18만 빼면 정치는 잘했다고 말하는 분이 많다”고 말했다. 윤 후보는 사흘 뒤 기자회견을 통해 “송구하다”며 몸을 낮췄지만 같은 날 캠프 실무진이 윤 후보의 반려견에게 ‘사과’를 주는 사진을 인스타그램 계정에 올리면서 더 큰 논란을 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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