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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울의 언어정담] 가깝기에 더욱 소중한 사랑을 위하여

삼시세끼 밥상에 빨래·청소 다 해주는

식구들 모두 당연하게 생각하는 엄마

언제부턴가 데면데면·티격태격이 일상

오늘은 엄마에게 고맙다고 말해보길







부모님 댁에 가서 화가 잔뜩 난 얼굴로 나올 때가 있습니다. 다 큰 어른인데도, 아직 어린애처럼 부모님에 대한 서운함을 표출합니다. 나이가 들면 철이 들 줄 알았는데. 화를 참는 연기력은 조금 늘었지만, 철은 조금도 들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퍼뜩 깨닫습니다. 아, 우리 부모님, 이제 연로하시구나. 이렇게 화가 난 채로 헤어지면 안 돼. 다시 돌아가서 내가 다 잘못했다고 말하자. 그래도 사랑한다고 말하자. 이제는 아주 쉽게, 이렇게 먼저 화해를 청합니다. 우리가 분노했던 순간이 부모님과의 마지막 작별인사가 되면 안 되니까요.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서 가장 가슴 아팠던 장면은 평생 고생만 하던 어머니와의 갑작스런 이별이었습니다. 아무도 엄마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았죠. 장례식에서야 그녀의 이름이 밝혀집니다. 고(故) 곽혜숙(이경성). 그녀는 365일 쉬는 날 없이 다섯 식구와 일꾼 구씨(손석구)의 몫까지 삼시세끼를 챙기고, 공장일을 거들고, 뙤약볕 아래 밭일까지 해왔습니다. 아무도 고생만 하는 엄마에게 다정한 말 한 마디 못해준 상태에서 엄마가 갑자기 세상을 떠납니다. 장녀 염기정(이엘)은 엄마가 그토록 보고 싶어한 사윗감 태훈(이기우) 앞에서 엄마의 신분을 숨기지요. 사윗감 얼굴 한 번 보겠다고 몰래 음식점에 따라 나온 엄마가 창피했던 거예요. 하지만 사윗감을 그렇게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시는데, 어떻게 엄마임을 숨길 수가 있었는지, 딸의 태도가 가혹하게 느껴졌습니다. 정식 상견례가 아니었기에, ‘엄마가 딱 한 번 몰래 얼굴만 보겠다’고 한 무리한 만남이었기에, 딸의 마음도 이해는 되었어요. 엄마가 딸의 연애에 과도하게 관심을 가지는 것이 딸로서는 불편하지만, 엄마의 관심이 어떻게 과도하지 않을 수 있나요.



큰딸의 남편감에 어떻게 관심이 없을 수가 있었을까요. 딸을 그토록 사랑하는데, 어떻게 거리를 둘 수가 있나요. 자식에게 진심으로 ‘쿨’ 할 수 있는 엄마가 세상에 몇 명이나 될까요. 하지만 ‘옛날 사람’인 엄마는 딸에게 그런 마음을 잘 표현하지 못합니다. 딸은 엄마의 그 간절함을 모른 채, 엄마와 작별인사도 나누지 못한 채, 모녀는 영원히 헤어집니다. 식구들 모두 엄마를 당연한 사람으로 여겼지요. 당연히 늘 집에 있는 사람, 당연히 세 끼 밥상 차려주고, 빨래와 청소를 해주고, 그저 거기서 한없이 우리를 기다리는 사람. 하지만 엄마는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엄마는 그냥 그렇게 당연히 우리를 기다리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지요. 엄마는 온 힘을 다해 온 가족을 지켜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가까운 사람에게 진심으로 친절하기는 왜 이토록 어려운 걸까요. 데면데면, 티격태격, 츤데레(쌀쌀맞아 보이지만 속으로는 다정한), 겉은 무뚝뚝하고 속만 따듯한 그런 사랑 말고, 겉과 속이 비슷하게 다정하고 예의 바른 사랑을 할 수는 없는 걸까요. 완벽한 사랑은 아닐지라도 아주 조심스러운 사랑은 가능합니다. 가까운 사이에서도 서로의 가장 아픈 부분, 서로의 아킬레스건을 존중해주는 예의 바른 사랑은 필요합니다.

우리가 받아왔던 모든 사랑은 결코 당연하지 않습니다. 가까운 이에게 받은 사랑이 그저 당연하고 무덤덤한 거라 여긴다면, 그것은 우리의 자만심 때문일지 모릅니다. 우리가 받아온 모든 사랑은 힘겹게 인생의 장애물을 뛰어넘은 사람들의 안간힘에서 빚어진 것들입니다. 부모의 사랑도, 연인이나 친구나 스승의 사랑도, 결코 당연하지 않습니다. 고통 속에서 무너지고, 넘어지고, 무릎 꿇어본 사람들만이 이 당연하지 않은 사랑에 배어 있는 깊은 슬픔과 고귀함을 압니다. 오늘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동안 ‘겉으로는 무뚝뚝하고 속으로만 다정하던’ 나를 버리고, 겉도 속도 다정한 해맑은 딸로 잠깐이나마 변신해 보았습니다. “엄마, 나 낳아줘서 고마워. 그리고 엄마, 내 엄마가 되어줘서 정말 고마워. 사랑해.” 가장 아픈 곳에서 태어나는 가장 따스한 사랑이 마침내 우리를 버티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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